보시다시피 티스토리로 글이 보호되어 있습니다. 비번은 <건국애니07>을 치시면
다운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을 보시면서 참고하시면 제가 발표한 내용에 대해서 어느정도 보충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정없이 아름답고 거창한 수식어로 포장된 히어로물에 반해 <심슨>은 특유의 담백하고 깔끔한 유머와 풍자, 해학을 갖춘 미국의 장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물이다. 중산층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많아 보이는 심슨네 가족들이 스프링필드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좌충우돌하며 사는 다분히 미국적 소재의 애니메이션이지만, 다양한 사건과 웃음, 늘 계몽적이지만은 않은 결론은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TV시리즈 <심슨>이 극장판 <심슨가족, 더 무비>로 거듭 날 때의 가장 큰 특징은 TV에서 늘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을 극장에 와서까지 보는 고마운 관객을 위한 스펙타클, 즉 다양한 눈요기 꺼리다. 극장판 특유의 좀 더 화려하고 스케일이 커진 장면들을 곳곳에 배치해 색다른 눈요기감을 제공하지만 심슨 시리즈의 특징은 적절한 패러디와 미국식 유머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TV판 <심슨>을 보고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20여분의 에피소드를 네 배나 긴 러닝타임의 극장용으로 만들면서 구성자체가 달라진다는 것과는 뭔가 다른 문제였다.
극장판의 이야기 구성 역시 TV판과 기본적인 틀에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친 사고로 인해 더 바보같이 행동하는 스프링필드 주민들의 행태가 던져주는 미국 사회에 대한 모종의 통렬한 풍자의 전달. 그러나 극장판에서는 호머를 바보로 만들지만 바보로 보이지 않게끔 했던 가장 큰 이유가 상실된 느낌이었다. 물론 심슨 가족이 마을로 돌아온 뒤에 보여 지는 마을의 풍경은 얼추 TV판의 풍자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존에 보여주었던 그대로의 복제일 뿐, 환경문제나 공동체에 대한 문제, 혹은 미국 사회의 모순적인 풍경에 있어서 피상적인 모습을 주마간산처럼 보여주며 길어진 러닝타임만큼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심슨가족, 더 무비>만의 시종일관 유쾌한 구성과 유머는 TV판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미국사회에 대한 약간의 내공과 이슈성 다큐를 섭렵했다면 더욱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무리 없이 즐기기에 나쁘지 않았다. 20세기 폭스사 제작의 미국 애니메이션이니 만큼 <심슨>의 유머는 제도권 안에서의 놀음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tv판과는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던 극장판이다.
교보문고가서 찾은 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그런데, 책 제목을 안적어왔네요 -_-;;;
Fedor Khitruk was born in the Russian town of Tver in 1917 but has lived in Moscow Since 1924. In 1931 his father was sent to Berlin on government business, which meant that Khitruk went to study at a school of commercial art in Stuttgart. Returning to Moscow in 1934, he was inspired to experiment with animation after he sas Disney's Band Concert at the 1935 Moscow International Film Festival. 'I dreamed of being an Artist, actor, and Musician.', he says. Animation collects all of these professions together.
In 1937 Khitruk began his animation career at the state-run animation studio Soyuzmultfilm, which was founded in 1936 as the only production company for Soviet animation artists. However, on the outbreak of the Second Would War, Khitruk joined the Army. Because he spoke German Fluently he remained involved in post war-negotiations until 1948, when he finally returned to Soyuzmultfilm to work on feature films directed by such important figures as Ivan-Ivanow-Vano.
Khitruk became a director in his own right in 1960, directing over 15 films, including 'Story of one Crime(1962), Film Film Film(1968), The youth Friedrich Engels(1970), and Lion and the Bull(1983).' He also made three films based on A.A Milne's classic book, Winnie the Pooh. 'The Idea behind them was simple. To screen a book which I loved so much.' he says simply. 'At that time I didn't know about the Pooh-serial made by Disney, though Woolie[Wolfgang] Reitherman[of Disney] did say he liked my version.
Although Khitruk stopped making films in 1983, he remains passionate about the Communicative power of the Medium. 'The Art of Animation, which gives life to the inanimate, has the power to touch all people, both adults and children and to bring them together, transcending nationality and language.' he has said.
Khitruk is also convinced of the importance of education in Animation, and he has been hugely influential in this field since 1956. Having observed the radical changes within the Industry, he is slightly sceptical of the supposed benefits created by computer technology. 'There are still only few artists, such as John Lasseter, who master the computer as an artistic tool.' he explains, 'In most cases it is only a demonstration of the new technical posibilities of computer hardware.'
He served as the president of the Animation Commission USSR from 1962 to 1989 and was the vice-president of the leading animation body, ASIFA, from 1970 to 1980. He has also sat on he juries at many international Festivals, from Hiroshima and Los Angeles to Zagreb, while he remains the honorary president of the Russian Animation Association. Khitruk is widely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figures in Russian Animation.
해석이 이상하게 된 부분이 많음 -_-;; 하찮은 영어실력
표도르 히트룩은 1917년 러시아의 트붸르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1924년까지 모스코바에서 살았다. 1931년에 그의 아버지는 정부 정책에 따라 베를린으로 보내졌고, 그것은 히트룩이 Stuttgart 의 상업미술 학교에 공부하러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4년 모스코바로 돌아왔을 때, 그는 1935년에 모스코바에서 열린 인터네셔널 필름 페스티벌에서 디즈니의 ‘밴드 콘서트’ 를 보고 실험 애니메이션에 영감을 받았다. "나는 아티스트, 연기자, 음악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애니메이션은 이 직업들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1937년, 히트룩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소유즈몰트 필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그의 애니메이션 경력을 시작하였다. 소유즈몰트필름 스튜디오는 1936년 당시 소비에트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를 위한 유일한 프로덕션이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히트룩은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독일어가 유창하였기 때문에 1948년까지 전후 협상 작업에 남게 되었고, 결국 ????????????????? (해석불가, 도움 요청요...ㅜㅠ)
히트룩은 1960년에야 그의 작품을 감독하였고, 15편에 이르는 작품을 감독하였는데, 어느 범죄자 이야기, 필름 필름 필름, the youthe fridrich engels 황소와 사자 와 같은. 그는 또한 A.A.밀네의 클래식 북인 위니더 푸에 기반한 세 편의 필름을 만들었다. ‘아이디어는 간단합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을 영사하기만 하면 되었죠. 그는 간단히 말했다. 그 시절에 나는 디즈니에서 푸 시리즈를 만들지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울리 리히터맨은 내 버젼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히트룩은 1983년 필름제작을 중단했지만, 매체의 소통의 힘에 대한 정렬을 남겼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애니메이션 아트는 어른과 아이 모두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와 언어적 장벽을 넘어 그들을 함께 데리고 온다. 그는 말했다.
히트룩은 또한 애니메이션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그는 1956년까지 이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산업의 급격한 변화를 관찰해오면서, 그는 컴퓨터 기술에 의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이익에 대해서 약간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컴퓨터를 아티스틱한 툴로서 쓰는 컴퓨터 마스터인 존 라스터와 같은 아티스트가 여전이 조금은 남아있다. 그는 설명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것은 오직 컴퓨터 하드웨어의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의 증거일 뿐이다.
그는 1962년부터 1989년까지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의 애니메이션 위원회의 장을 역임하였으며, 1970년부터 1980년까지 asifa의 부총재를 맡았다. 그는 또한 그가 러시아 애니메이션 기구의 명예총재로 있을 때까지 히로시마 패트시벌과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자그렙까지 많은 국제 페스티벌의 심사를 맡았다. 히트룩은 러시아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나는 왜 오세암이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는가? 에 대한 측면에서 조사를 해보았다.
우선 오세암의 코드에 대한 분석을 해보자. 오세암은 길손이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오세암의 주체는 엄마를 마음의 눈으로 찾고자 하는 길손이다. 그러니 그 속에 주제의식은 통괄적으로 엄마를 찾는 길손이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인공 길손의 시점에서는 엄마를 찾는 이야기가 길손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을 따라 산에 올라가는 이유 또한 엄마를 보기 위한 마음의 눈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길손이의 욕망을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길손이가 엄마를 찾는 욕망에 대한 타당한 근거 제시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에 엄마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길손이가 아기였을 때 엄마는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부분에 우리는 엄마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그 안타까움을 느낄 이유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장면 중에는 못된 아이 둘이 나와 길손이와 감이를 괴롭히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 나중에 못된 형제 둘의 엄마가 나타나서 길손이를 꾸지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쩌면 감독의 의도는 길손이가 엄마를 찾는 욕망에 대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단지 다른 아이들은 다 있는 엄마라는 존재가 나에게는 없다는 이유로 엄마를 그리워하고 엄마를 보기위한 마음의 눈을 얻기 위해 그 험난한 산을 수행한다는 것이 과연 관객들에게도 이해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남는다. 감독은 아이의 5세라는 이야기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는 하지만 길손이의 순수함과 아이가 엄마를 찾는 동기와는 연관을 짓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욕망의 장애물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스토리 구성에 필요 요소는 캐릭터의 욕망과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있으면 당연히 그에 대한 장애물이 있다. 또한 장애물은 애니메이션의 흐름과 구성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길손이가 마음의 눈을 얻기 위한 장애물은 어떤 것인가? 필자는 산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산행 속에 길손이는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역경을 견뎌 관세보살님에게 마음의 눈을 얻어 엄마를 볼 수 있다는 내러티브 구조를 가졌는데, 이 장애물은 애니메이션의 흐름에 맥을 끊는 단점을 보이기도 한다. 장애물이란 초반부터 암시와 복선의 과정을 거쳐 클라이막스 부분에 터트려 줘야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기 마련인데 산행이란 장애는 이야기 중반부터 너무 생뚱맞게 나온다.
스님이 길손이에게 산행을 제안하는 대화 이전에 그 산행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맞춰주어야 하는 산행(장애물)은 이야기의 맥을 끊는 단점을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관세보살을 만났을 때 이야기가 갑자기 나오고 강의실에서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이야기의 급전환에 대해 생뚱맞음을 느끼면 웃은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 장면에서 그런 이유로 웃었고 이 오세암을 본 수많은 관객들 중에 다수가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중에 길손이가 마음을 열어 엄마한테 가는 욕망의 성취는 감흥을 일으키기 어렵다. 우리는 그 전부터 길손이의 욕망의 타당성을 늦기지 못하고 그 욕망에 동요를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오히려 감이의 시점이 캐릭터의 주체성과 욕망표출, 그리고 관객들에게 주제전달에 효과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감이는 이미 엄마와 지내는 즐거운 나날들이 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그 회상 장면을 보면 감이의 엄마사랑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감이는 엄마의 부재를 알고 있으며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길손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캐릭터가 살아 있지 않음으로 인해 살아날 수 있는 캐릭터는 안타깝게 나타나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라는 존재를 믿고 싶고 그것을 얻기 위해 무슨 역경이라도 헤쳐갈 수 있으면 우리에게 좀 더 주제의식과 엄마의 그리움에 대한 연민을 얻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장애물로서 많은 설정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길손이가 감이가 엄마를 찾기 위한 장애가 될 수 이다. 엄마를 찾는 것과 동생을 돌본다는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내면갈등이라는 장애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구성보다는 캐릭터설정에 너무 초점을 잡은 것이 아닌가.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컨셉아트 부분에서도 아쉬움이 크다. 픽사 같은 경우는 모든 작품들이 다 한 제작사에서 만들어낸 작품이다. 하지만 그 작품마다의 컨셉은 각양각색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색과 명암과 구성에 대한 컨셉을 작품의 네러티브에 맞게 창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아쉬움은 바로 이런 점이다. 다른 회사 다른 감독의 다른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모든 작품들이 같은 그림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오세암 또한 그렇다. 그저 바다는 파랑색 구름은 하얀색 흙은 갈색 이런 색에 대한 단순한 생각만 있을 뿐 그림의 컨셉아트 부분에서는 다른 나라 애니만큼 생각을 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중국 애니메이션의 큰 장점은 바로 중국 애니라는 스타일이 나기 때문이다. 단순한 선의 느낌과 중국의 컨셉에 맞는 색체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요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림 컨셉아트의 중요성에 대해 알았으면 좋겠다. 한국 애니메이션을 성장과 주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그 작품의 퀄리티를 높여주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운드 구조에서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캐릭터의 성우라든가 노래라든가 우리 나라 정서를 살리기엔 좋았다고는 하나 너무 ‘달려라 하니’가 방송 된 옛날 시대에 초점을 둬 세대의 정서를 살리지 못한 것 같다. 특히 감이의 목소리와 대사 부분이 그러하다.
노래부분이 특히나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섬 그늘에’라는 노래는 애니메이션의 한국적인 분위기를 멋들어지게 살릴 수 있는 효과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감이의 성우다. 차라리 성우가 부르기 보다는 가수가 불러 촌스럽지 않고 멋지게 연출 할 수 있지 않았을 까? 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 애니메이션의 중요한 흥행실패 요인은 작품이 어는 연령대에 맞춰서 내용을 만들었는지 의문이 간다는 점이다. 어른을 공략하기에는 너무 스토리가 단순하고 아이들에게 맞추었다기 보다는 너무 진지한 스토리다. 차라리 아이들을 연령대에 맞추었으면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판타지라는 요소를 섞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울과 센과 치히로는 내용이 아이들이 보기엔 약간 복잡한 구성을 갔는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이유는 바로 판타지라는 요소 때문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마법들 그리고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귀엽고 캐릭터성 강한 귀신들, 이런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은 아이들의 동심을 얻는 애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세암에게는 아이들을 어필 할 수 있는 요소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보기에는 내러티브 구조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흥행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오세암은 한국 정서를 보여주기 위한 한국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마겟돈이라던지 블루시걸에 비해 우리 나라의 색체를 보여주려는 시도가 많았고 그 영화 속 액팅 또한 거의 세계의 프로급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한국 애니메이션을 발전 하기 위해서는 장점만을 찾기 보다는 단점을 찾아 그것을 보안하는 것이 우리의 큰 과제라 생각하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오세암에 대한 흥행실패에 대한 물음과 답을 구해보았다.
200713033 심영보
오세암
보는 내내 참 낯부끄러웠던 필름이다. 보통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유치한 상황 연출은 로맨틱한 장면일 경우가 많은데, 로맨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부끄러울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참고로 민망한 상황 연출의 대가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생각이 든다. 미야자키의 필름 속 로맨스는 어찌 그리 부끄럽던지... 센과 치히로의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 씬이나 아시타카의 ‘당신은 아름다워’ 씬은 충격과 낯 뜨거움의 결정체였다.)
오세암을 남부끄럽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대사이다. 대사 자체는 아름답다. 그러나 지나치게 소설적이다. 소설적인 대사는 소설 속에서는 어색하지 않지만, 영상에서는 다른 문제다.
소설과 영상의 가장 큰 차이는 시간성이다. 소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단 하루의 시간을 수십 권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수십 년의 시간을 한 권에 압축할 수도 있다. 주인공의 기나긴 독백을 읽으면서도 독자는 그 독백이 고작 5초 안에 떠올린 감상이라는 사실을 굳이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이 이렇듯 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자가 소설을 통해서 보는 것은 어느 누군가의 ‘기억의 기록’ 이다. 마치 일기장처럼. 소설은 독자의 시간을 장악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 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났던, 혹은 일어날 수 있는 누군가의 기억’ 으로 여기게 된다. 기억은 개인의 감정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1초의 순간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영원처럼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독자는 무의식중에 그런 ‘가능성’ 을 배제하지 않게 되고, 이것이 소설이 엿가락 늘이듯 시간을 주무를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영상은 다르다. 관객이 영상을 보는 동안에도 시간은 꾸준히 흘러간다. 관객은 주인공이 체험하는 시간과 자신이 영화를 보며 흐르는 시간을 동시간대의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특별히 시간과 관련된 연출이 삽입되지 않는다면, 시간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관객의 감정 이입은 끊어져 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면, 실제로 관객이 그 부분의 필름을 보는 시간 또한 짧아야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보통 데이트 장면을 표현할 때, 1분 안에 노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쉬움을 표현하지 하루 종일 노는 모습을 길게 보여주고는 “어머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라는 대사로 때우지는 않는다.
오세암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감이의 서정적인 대사는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인 상황 속에서 어울리는 대사이다. 그러나 감이는 그 상황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보내는 듯한 감성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관객에게는 고작 몇 초 만에 훌쩍 넘어가버리는 시간인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몇 초간 단풍잎좀 만져보았다고 시 한수가 절로 나오는 감이의 캐릭터성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그 이전에 감이가 감정을 이입해야 할 대상이 맞는지도 애매모호하다. 대체 누구의 시간에 관객의 시간을 맞춰야 하는가? 주인공은 누구인가?
오세암의 틈틈이 긴장을 풀어주는 개그요소라던지, 부처님의 입만을 보여주는 연출 등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싶었다면, 관객이 동조할 수 있는 명확한 주인공을 제시하고 그가 느끼는 시간을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도 저도 아닌 방관자적 위치에 놓인 관객에게 섬세한 감성적 대사를 들려준들 민망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뿐이다.
1960년대 작품인 <어느 범죄 이야기>는 평범한 소시민이 범죄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표현한 표도르 히트룩의 대표작이다. <액자 속의 사나이>와 더불어 그의 작품 속에서는 소비에트 사회의 문제점과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져 있다. 거대한 사회속의 고독한 존재인 바실리 바실리예비치를 통해 내비치는 소통이 부재한 사회와 모순. 그 고독감은 주인공의 고통을 이중으로 가중시키며 거대한 사회속의 저항할 힘이 없는 무기력한 존재를 향한 동질감이라는 공감대를 형성시킨다.
억압받는 개인의 권리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라는 심도 있는 메시지는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줄기와 인지를 크게 바꾸어 놓기도 했다. 어린이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기존의 러시아 민화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흐름과는 달리 <어느 범죄 이야기>는 사회 속에 사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체적인 진단과 메타포를 제시해 준다. 또한 기존 애니메이션의 재현과 묘사적 요소를 거부하고, 순수 형태의 구성을 취지로 한 구성주의적 형식과 콜라주 기법은 이러한 메시지들과 한층 더 부합하여 표도르 히트룩의 명성을 더욱 실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악명 높았다던 소비에트의 검열 속에서 애니메이션 역사의 빛과 소금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걸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극심한 경쟁 속에서 상업성을 그 생명력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예술과는 무언가 차원이 다른 소비에트의 예술. 무한정 공급되는 ‘당근’이 있었던 것도, 자유로운 창작과 표현이 보장되는 사회도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생계’ 그 위에 바로 작품이 존재했던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양날의 검처럼 보장과 제한이라는 두 저울이 팽팽하게 유지되었던 그 사회는 작가들에게 지옥이라면 지옥, 천국이라면 천국이 아니었을까?
유리 놀스테인(Yuri Norstein), 표도르 히트룩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정치 체제와 함께 그때의 문화를 싸잡아서 평가절하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어쩐지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 이들의 걸출한 예술작품들은 프라우다나 이즈베스티야같은 매체와는 또 다른 관객의 눈이자 새로운 환상적 텍스트의 장이 아니었을까.
얀 스반크 마이어
영상과 200415400 이홍규
그의 작품은 기괴하고 독창적이며 인상적이다. 물론 이 표현엔 무조건적인 긍정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록 팀 버튼, 테리 길리엄, 퀘이 형제에게 큰 영향을 준 거장이라 할지라도, 그의 작품은 내게 혼란스러움과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어느새 내면에서 둘로 나뉘어 그의 작품을 나름의 주관에 의해 해석하게 된다.
우선,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그의 작품 ‘자바워크’에서 새끼 인형이 어미인형의 몸속에서 나오고 마치 거미인양 어미를 먹어치우는 식의 연출이나, 새싹이 돋고 나무가 자라 열매가 열렸는데 그 안에 온통 구더기가 들어있는 씬의 경우에는 혐오스러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2000년도 작품인 ‘Otesanek’에서는 그 수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사람모양의 나무뿌리가 아내의 사랑을 받아 실제 살아 움직이게 되어 고양이나 사람을 처참히 잡아먹는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일반적인 정서와 통념을 넘어서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성으로 다가오기보다는 그 외의 부정적인 감상들이 앞서, 본질적인 메시지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는 듯 했다. 물론 이것은 나의 경우에 국한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과도한 잔인함과 징그러운 표현법은 아무래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다른 한편에선 그만의 독보적인 장점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장점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강하게 각인되었다. 일반적인 통념을 철저히 깨부순 그의 천재적인 연출과 거침없고 과감한 표현방식은 ‘자바워크’에서는 옷에 불과한 와이셔츠를 살아 춤추게 하고, 그 빈 소매에서는 병정들이 나와 행군을 하는 등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모순적이고 희한한 오브제들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그 스타일은 위에서 언급했던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큰 자극이 되어주었고,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얀 스반크 마이어는 고유의 경험에 생명을 불어넣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생각보다 놀라웠다. 그의 작품에선 먹는 것에 대한 행위가 자주 드러나는데 그것은 유년시절 허약한 아이였던 그에게 부모가 음식을 강제로 먹이곤 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의 무의식적인 표현이었다고 한다. 또 그 때문인지 그는 음식(食)에 대해 문명의 심벌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창작자에게 있어 경험이 얼마나 소중하고 위대한 자산인지 그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비록 그가 가지고 있는 표현방식에 있어 익숙하지 않고 생소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스타일에서 풍기는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호기심과 상상력의 향취는 그것을 감수해내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액션에 굳이 경계를 두지 않고 그것들 모두를 그저 생각에 대한 표현방식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그를 통해 너무 작은 것에만 얽매여왔던 나의 좁은 식견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령공주> 감상 100자평
200415400 이홍규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통해 ‘반전’과 ‘환경 파괴’에 대한 메시지를 작품 속에 담아 내며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수없이 노력해왔다.
이 두 가지 메시지는 전 인류적 측면해서 생각해봤을 때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이고 또 그 문제점들이 공론화 됐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변화의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수 많은 이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반전과 환경보호를 외치곤 하지만 지나가는 행인들의 귀에 그것은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이처럼 남에게 이해시키고 공감을 불러일으켜 심경의 변화를 만들어내기가 지극히도 어려운 일들을 하야오는 자신만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꾸준하면서도 강렬하게 전달 해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메시지 전달법이 별책부록처럼 그 자체를 억지로 끼워 넣어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식은 아니다, 그는 신화와 전설, 민담등을 기반으로 한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첨가하여 애니메이션을 만들되, 그 애니메이션의 기저에 메시지를 교묘하면서도 산발적으로 끼워 넣곤 한다. 그 때문에 굳이 누가 ‘환경을 좀 지켜주세요’, ‘제발 전쟁 따윈 이제 그만 두자구요’ 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 2시간 가량을 감상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고판단의 기준까지 다르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원령공주는 하야오의 교묘하고도 철두철미한 전략이 드러난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신화적인 구조의 하나로 기본 골격이 이루어져있는 이 작품은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힘을 과용했을 때 환경에 의해 그 힘이 역순환 하게 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나무를 베는 인간들과 그 숲에 살며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숲의 신간의 대립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마치 자연이 제 것 인듯 무차별적으로 파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돌이켜보며 이대로 파괴가 계속된다면 숲의 신들처럼 자연도 현실세계의 우리에게 어떠한 재앙을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시타카에게 내려진 저주 또한 그 역행의 일환으로 생각 해 볼 수 있다.
하야오의 고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마을 사람들도 결과적으로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처지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벌목을 하고 있다는것도 함께 보여줌으로써 현재 인간과 자연사이의 절대적인 관계구도를 규정하기 보다는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타협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를 지향하려는 의지가 내포 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애니메이션 내에서의 결말은 좀 시원스럽지 못하다. 인간들의 분쟁의 중재자였던 아시타카와 자연들의 분쟁의 중재자였던 산이 결말에 다다라서는 서로의 영역에서 자리를 지키기로 하고 헤어지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종국에 와서도 자연과 인간의 완벽한 공존과 화합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와 더불어 아직도 그 분쟁의 씨앗은 종식되지 않았고 우리가 그 사실을 주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반복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전세계적으로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자신만의 스타일로 기상천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반으로 전 인류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항상 던져주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리 재미있고 화려한 애니메이션일지라도 그 작품을 보고나서 남는 메시지가 고작 ‘강자는 승리한다’ 정도라면 너무 허무하고 어이없지 않겠는가?
물론 재미와 메시지라는 두가지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일이고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하야오가 세계적인 감독으로서 인정받고 세계인들의 이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국가는 전설을 바탕으로 설립되고, 전설은 이미 세력을 잡은 권력자들의 구미에 맞게 아주 희미한 내용을 바탕으로 후손들이 만들어낸다. 미야자키의 어둠에 관한,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어조의 이 영화는 유럽의 꿈을 거슬러 올라가 일본의 희미하면서 상상으로 만들어진 과거에 이르기까지를 그 배경으로 삼는다.
그는 ‘일본의 고대 전설’, ‘민담’이라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아이디어 창고로 언급하며 그 가능성을 강조해 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이 <원령공주>의 초석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 감독은 그가 초창기 시절부터 품어왔던 주제를 야기 시켜 하나의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시나리오의 윤곽을 잡아왔다. 자연의 힘, 거대한 압제자와 맞서 싸우는 약자들의 투쟁,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사랑의 가치가 그것이다.
그러나 <원령공주>에서 그는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추구했다. 자연과 문명의 공존, 향수, 조화의 메시지를 떠나 좀 더 현실사회의 상처와 고통을 대변할 수 있는 작품으로써 관객에게 다가서길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스스로에게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원령공주>라는 영화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본인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저주를 받게 된 21세기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그는 아시타카가 지닌 저주의 증거인 화상 자국을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생명을 위협하고 몸으로 느끼는 고통으로 바라본다. 이 상처를 치료해가는 과정과 갈등은 현대인들에게 과거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보다 직설적인 충고를 던져준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은 작품 속에 깊숙이 녹아 있다. 독선을 향한 질타, 어느 한 쪽이 주장하는 옳고 그름과 그 기준에 맞춰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행위. 이것은 <원령공주>의 가장 핵심적인 갈등과 일련의 모순 덩어리를 엮어가고 있으며, 그 주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위험해지는 세상에서 부족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서로 다른 두 종족간의 투쟁과 긴장관계로써 나타난다.
현대의 삶은 여러 가지 문제가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고통, 상실, 분노, 변화, 복잡함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야자키는 인간과 신들의 물리적인 싸움을 통해 드러난 인간과 초자연적인 존재 사이의 관계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원령공주>를 통해 21세기가 온전히 안고 있는 하나의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