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자연의 모습과 지금은 사라져버린 고대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을 알리는 원령공주는제목에서 느껴지듯이 많은 원한과 슬픔을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원령공주는 삶 자체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여기선 크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자연과 자연의 대립적 구도로 끊임없는 전쟁을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히 자신들의 권력과 힘을 위한 욕망으로 싸우는 자,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 원한에 사묻혀 싸우는 자 등 억지스러운 인간의 내면이나 살기위한 욕망을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표현하고 있었다.
우리는 주인공인 아시타카의 눈을 통해 이 모든 싸움을 지켜본다.
직접적으로 전쟁에 중심에서 그는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전쟁을 보고 있었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쟁의 고통을 짊어지며 그 괴로움을 전하려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전쟁을 지켜보며 우리는 그 잔혹함을 느끼고 반대편에 있는 자들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대립의 중심에 있던 아시타카의 눈에선 선과악을 따질 수 없었다. 자연도 인간도 단순히 살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함께 공생하기엔 사는 방식이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단지 그 차이에 그들은 싸울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살아갈 방법은 없는가?"
아시타카가 에보시에게 한 질문이자 감독이 우리에게 한 질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끝나고 점점 사라져가는 자연의 형태들을 생각해보았다. 위협적으로 보였던 에보시의 제철공장이 이미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자연들이 오염되고 사라졌다. 그리고 우린 계속 새로운 재앙을 받고 있었다. 질병, 재해 등 이 모든 것이 애니메이션에서 분노에 빠져 생명을 빼앗아 가던 사슴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
마지막에 고대와 자연을 대표하던 사슴신이 쓰러지고 모든 것을 다시 태초의 자연상태로 돌린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태고의 신들도 전쟁으로 인해 그 대부분이 사라져 버린다. 멀지 않은 미래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자연만이 남은 종말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감독은 아시타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대립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고대부족이였던 에미시 일족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을 바탕으로 살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들은 고대에 자연과 함께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최후의 후예로 표현되던 아시타카를 보며 우리는 선조의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을 떠올려본다. 그가 마을을 떠나 문명화된 곳을 여행하게 된 것은 문명인들이 잊어버린 자연과의 공생을 떠올리게 하기 위함이아니였을까.
자연 그 자체에 녹아든 사슴신을 느껴본다. 그리고 '숲의 비명소리가 느껴지지 않느냐'던 모로의 말을 다시 가슴에 새기며,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살았던 조상들의 그 모습과 지혜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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