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공주
200713033 심영보
나는 원령공주를 맨 처음 보았을 때 굉장히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볼 땐 못 만들어서 재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이유를 알 것 같다. 확실히 말해서 이 작품은 결론이란 게 없다. 끝까지 다 보고 나서도 ‘자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됐다는 소리지?’ 라는 번뇌에 휩싸이게 된다. 용두사미형 실수는 실패한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원령공주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왜? 감독 혼자만 인정하는 망한 영화의 ‘열린 결말’ 과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은 원령공주의 ‘열린 결말’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원령공주에서 없는 것은 결론뿐만이 아니다. 선악구도 자체가 희미하다.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들과 대립하는 몬스터는 초반부터 신성시되던 절대신이다. 이외 다른 인물들도 선악의 양면성을 가지고 그 경계를 넘나든다. 그나마 가장 선에 가까운 존재가 아시타카와 산이겠지만,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못하고 서로를 떠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사람도 자신의 세계를 넘어가면서까지 상대를 포용하는 절대선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못한다.)
선악구도가 없는 상태에서의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감독이 이용하는 것은 ‘상황’ 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명확히 존재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에보시는, 그들을 굶게 하느니 차라리 신들의 세계를 공격한다. 그녀의 선택은 환경의 파괴를 가져오지만, 또한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 신장을 가져온다. 그녀의 선택은 개인의 욕망에 휩쓸리는 경우 보다는 상황상, 어쩔 수 없이 강요되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이것이 포인트다. 선악구도가 명확한 헐리우드식 애니메이션은 악당을 무찌르면 세상이 구원된다. 당연히, 우리 편인 영웅은 결점이 거의 없는 인간이다. 있어봤자 중년에다 뱃살이 좀 늘어진 정도?(인크레더블) 하지만 원령공주의 인물들은 무분별한 선의나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소망은 함부로 폄하할 수 없는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를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도 많다. 내용의 전개를 위해서 영생을 원하는 탐욕스러운 무리를 집어넣긴 했지만, 그게 주된 갈등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하다. 절대악도 없고 악당도 없으니, 한두 사람 무찌른다고 상황이 회복되지도 않는다. 그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쪽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쪽만이 나뉠 뿐이다.
결국 감독은 영웅도 악당도 없는 세상이 어떻게 멸망을 향해 굴러가는지를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휩쓸리는 개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다 보니 미야자키의 필름은 묘하게 전쟁 영화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많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영웅이 없는 사회.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담이지만, 미야자키의 캐릭터들은 상당히 순수하고 매력적인 인간으로 표현되는 편이다. 어느 필름이든 항상 등장하는 씩씩한 소녀와 속 깊은 소년의 캐릭터는, 단지 매력만을 위해서만 설정된 것은 아니다. 저런 선악구별 없는 내용을 끌어나가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적인 매력이 필요하다.
... 뭐... 사실 감독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