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8일 금요일
200713047 천혜림 - 오세암 감상평
애니메이션 <오세암>은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故 정채봉 선생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던 원작을 순수함 가득한 가족용 애니메이션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한 제작진들의 노고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푸근한 한국 고유의 정서를 담아내겠다는 의지로 기획되어진 <오세암>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성장기가 담긴 서정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되어 많은 관객들의 관심 속에 표면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故 정채봉 선생 특유의 시적 표현이 상당 부분 살려져 있는 감성적 대사와 작품 전반에 깔린 한국적 신파극 형태의 정서는 작품에 대한 평가를 극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흔히 <오세암>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는 영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그리움이라는 감정, 한국적인 인물과 전경의 표현은 네러티브적 요소 및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 자체가 관객에게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의 가장 큰 비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오세암>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관객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연령대를 가늠할 수 없는 애매한 감성적 스토리에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게 하는 관객 또한 생겨나게 하였다. 확실히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기 전과 최근의 감상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관객의 반응과 평가가 극적으로 엇갈리기까지에는 감상의 시각적, 지식적 차이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오세암>이 극영화의 well-made적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스토리와 인물의 구조적 짜임새 및 전개가 주체적인 하나의 작품으로서 라기 보다는 전설과 원작의 재현에 좀 더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였기 때문에만 이해가 가능한 <오세암>이 가지는 한국애니메이션사의 커다란 의미 역시 주목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 유럽애니메이션 등의 자극적이고 화려하며 세련된 영상미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다소 부족하고 소박하게 다가왔을지 모르겠으나, <원더풀데이즈>와 같은 엄청난 제작비를 동행한 작품들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완성도와 영상미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많은 발전을 눈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어머니’라는 소재는 이미 한국인의 감성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소재이다. 영화, 만화, 문학을 통틀어 <오세암> 이전의 수많은 작품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가장 성스럽고 그리운, 한국인의 대표적인 고전적 향수의 표본이 바로 그것이다. 구성력 있는 전개와 심층적인 고찰이 이루어진 인물을 통해 이러한 소재를 표현했다면 시대를 아울러 모두가 동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진정 <오세암>이 추구하고자 했던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은 역시 개인의 감성에 의해 평가가 좌지우지 되곤 한다. 한 사람의 감성을 축적하는 것은 개인의 일생에 걸친 경험과 지식의 산물이다. 길손이처럼 어머니의 존재를 갈구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있는가하면, 밑도 끝도 없이 엄마를 그리워하는 길손이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오세암>은 모든 관객의 감성의 문을 열기에는 그 문턱이 너무 좁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직 자신의 감정에만 솔직한 어린 마음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지금은 간지럽지도 않은, 오로지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었던 창피하고 두려운 마음을 <오세암>을 보면서 조금 상기시켰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울려퍼지는 OST와 함께 그제야 수면위로 조금씩 울렁이는 아려한 향수와 추억은 오로지 <오세암>을 보면서만 느낄 수 있었던 행복이었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