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원령공주 100자평] 200415400 이홍규


<원령공주> 감상 100자평


200415400 이홍규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통해 ‘반전’과 ‘환경 파괴’에 대한 메시지를 작품 속에 담아 내며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수없이 노력해왔다.
이 두 가지 메시지는 전 인류적 측면해서 생각해봤을 때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이고 또 그 문제점들이 공론화 됐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변화의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수 많은 이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반전과 환경보호를 외치곤 하지만 지나가는 행인들의 귀에 그것은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이처럼 남에게 이해시키고 공감을 불러일으켜 심경의 변화를 만들어내기가 지극히도 어려운 일들을 하야오는 자신만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꾸준하면서도 강렬하게 전달 해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메시지 전달법이 별책부록처럼 그 자체를 억지로 끼워 넣어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식은 아니다, 그는 신화와 전설, 민담등을 기반으로 한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첨가하여 애니메이션을 만들되, 그 애니메이션의 기저에 메시지를 교묘하면서도 산발적으로 끼워 넣곤 한다. 그 때문에 굳이 누가 ‘환경을 좀 지켜주세요’, ‘제발 전쟁 따윈 이제 그만 두자구요’ 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 2시간 가량을 감상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고판단의 기준까지 다르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원령공주는 하야오의 교묘하고도 철두철미한 전략이 드러난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신화적인 구조의 하나로 기본 골격이 이루어져있는 이 작품은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힘을 과용했을 때 환경에 의해 그 힘이 역순환 하게 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나무를 베는 인간들과 그 숲에 살며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숲의 신간의 대립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마치 자연이 제 것 인듯 무차별적으로 파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돌이켜보며 이대로 파괴가 계속된다면 숲의 신들처럼 자연도 현실세계의 우리에게 어떠한 재앙을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시타카에게 내려진 저주 또한 그 역행의 일환으로 생각 해 볼 수 있다.
하야오의 고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마을 사람들도 결과적으로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처지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벌목을 하고 있다는것도 함께 보여줌으로써 현재 인간과 자연사이의 절대적인 관계구도를 규정하기 보다는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타협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를 지향하려는 의지가 내포 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애니메이션 내에서의 결말은 좀 시원스럽지 못하다. 인간들의 분쟁의 중재자였던 아시타카와 자연들의 분쟁의 중재자였던 산이 결말에 다다라서는 서로의 영역에서 자리를 지키기로 하고 헤어지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종국에 와서도 자연과 인간의 완벽한 공존과 화합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와 더불어 아직도 그 분쟁의 씨앗은 종식되지 않았고 우리가 그 사실을 주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반복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전세계적으로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자신만의 스타일로 기상천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반으로 전 인류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항상 던져주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리 재미있고 화려한 애니메이션일지라도 그 작품을 보고나서 남는 메시지가 고작 ‘강자는 승리한다’ 정도라면 너무 허무하고 어이없지 않겠는가?
물론 재미와 메시지라는 두가지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일이고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하야오가 세계적인 감독으로서 인정받고 세계인들의 이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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