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30일 일요일

Fedor Khitruk

교보문고가서 찾은 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그런데, 책 제목을 안적어왔네요 -_-;;;


Fedor Khitruk was born in the Russian town of Tver in 1917 but has lived in Moscow Since 1924. In 1931 his father was sent to Berlin on government business, which meant that Khitruk went to study at a school of commercial art in Stuttgart. Returning to Moscow in 1934, he was inspired to experiment with animation after he sas Disney's Band Concert at the 1935 Moscow International Film Festival. 'I dreamed of being an Artist, actor, and Musician.', he says. Animation collects all of these professions together.
In 1937 Khitruk began his animation career at the state-run animation studio Soyuzmultfilm, which was founded in 1936 as the only production company for Soviet animation artists. However, on the outbreak of the Second Would War, Khitruk joined the Army. Because he spoke German Fluently he remained involved in post war-negotiations until 1948, when he finally returned to Soyuzmultfilm to work on feature films directed by such important figures as Ivan-Ivanow-Vano.
Khitruk became a director in his own right in 1960, directing over 15 films, including 'Story of one Crime(1962), Film Film Film(1968), The youth Friedrich Engels(1970), and Lion and the Bull(1983).' He also made three films based on A.A Milne's classic book, Winnie the Pooh. 'The Idea behind them was simple. To screen a book which I loved so much.' he says simply. 'At that time I didn't know about the Pooh-serial made by Disney, though Woolie[Wolfgang] Reitherman[of Disney] did say he liked my version.
Although Khitruk stopped making films in 1983, he remains passionate about the Communicative power of the Medium. 'The Art of Animation, which gives life to the inanimate, has the power to touch all people, both adults and children and to bring them together, transcending nationality and language.' he has said.
Khitruk is also convinced of the importance of education in Animation, and he has been hugely influential in this field since 1956. Having observed the radical changes within the Industry, he is slightly sceptical of the supposed benefits created by computer technology. 'There are still only few artists, such as John Lasseter, who master the computer as an artistic tool.' he explains, 'In most cases it is only a demonstration of the new technical posibilities of computer hardware.'
He served as the president of the Animation Commission USSR from 1962 to 1989 and was the vice-president of the leading animation body, ASIFA, from 1970 to 1980. He has also sat on he juries at many international Festivals, from Hiroshima and Los Angeles to Zagreb, while he remains the honorary president of the Russian Animation Association. Khitruk is widely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figures in Russian Animation.


해석이 이상하게 된 부분이 많음 -_-;; 하찮은 영어실력

표도르 히트룩은 1917년 러시아의 트붸르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1924년까지 모스코바에서 살았다. 1931년에 그의 아버지는 정부 정책에 따라 베를린으로 보내졌고, 그것은 히트룩이 Stuttgart 의 상업미술 학교에 공부하러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4년 모스코바로 돌아왔을 때, 그는 1935년에 모스코바에서 열린 인터네셔널 필름 페스티벌에서 디즈니의 ‘밴드 콘서트’ 를 보고 실험 애니메이션에 영감을 받았다. "나는 아티스트, 연기자, 음악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애니메이션은 이 직업들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1937년, 히트룩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소유즈몰트 필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그의 애니메이션 경력을 시작하였다. 소유즈몰트필름 스튜디오는 1936년 당시 소비에트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를 위한 유일한 프로덕션이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히트룩은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독일어가 유창하였기 때문에 1948년까지 전후 협상 작업에 남게 되었고, 결국 ????????????????? (해석불가, 도움 요청요...ㅜㅠ)

히트룩은 1960년에야 그의 작품을 감독하였고, 15편에 이르는 작품을 감독하였는데, 어느 범죄자 이야기, 필름 필름 필름, the youthe fridrich engels 황소와 사자 와 같은. 그는 또한 A.A.밀네의 클래식 북인 위니더 푸에 기반한 세 편의 필름을 만들었다. ‘아이디어는 간단합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을 영사하기만 하면 되었죠. 그는 간단히 말했다. 그 시절에 나는 디즈니에서 푸 시리즈를 만들지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울리 리히터맨은 내 버젼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히트룩은 1983년 필름제작을 중단했지만, 매체의 소통의 힘에 대한 정렬을 남겼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애니메이션 아트는 어른과 아이 모두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와 언어적 장벽을 넘어 그들을 함께 데리고 온다. 그는 말했다.

히트룩은 또한 애니메이션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그는 1956년까지 이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산업의 급격한 변화를 관찰해오면서, 그는 컴퓨터 기술에 의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이익에 대해서 약간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컴퓨터를 아티스틱한 툴로서 쓰는 컴퓨터 마스터인 존 라스터와 같은 아티스트가 여전이 조금은 남아있다. 그는 설명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것은 오직 컴퓨터 하드웨어의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의 증거일 뿐이다.

그는 1962년부터 1989년까지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의 애니메이션 위원회의 장을 역임하였으며, 1970년부터 1980년까지 asifa의 부총재를 맡았다. 그는 또한 그가 러시아 애니메이션 기구의 명예총재로 있을 때까지 히로시마 패트시벌과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자그렙까지 많은 국제 페스티벌의 심사를 맡았다. 히트룩은 러시아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표도르 히트룩 자료, CARTOONS 에서 발췌(잘린 부분이 있음)

전에 Fedor Khitruk 에 관한 자료를 받았습니다. 프린트물인데, 복사 상태가 좋지 않아 끝이 잘린 페이지가 있어 영문을 해석하기 곤란한 단락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Eastern Europe -Fedor Khitruk
The major Russian animator of the 1960s was Fedor Khitruk(Tver, 1 May 1917). Before becoming a director himself, Khitruk spent 24 years as an animator at Sujuzmultfilm. 'The animators's work demands enormous effort,' he said. 'When I became aware that my physical strength was diminishing...I became a director.' His first film, Histoty of a Crime(1961) had a neorealist flavour. Why does the quiet, reserved clerk kill a noisy little lady? Because he is a victim of the many people who, at all times of the day or night, make noise and do not et him sleep;he is eventually pushed over the edge and kills the boisterous woman. Khitruk's graphics were innovative for the times and especially for Soviet Animation. He developed this film with sympathy for the man's misadventures, and without the manneristic optimism typical of the films produced in the Eastern block countries. Boniface's Vacation(1965), a delicate flilm for children, was a rare example of non-rhetorical work.
In 1968, he directed Film Film Film an apt satire on filmmaking, from creation to directing, which annoyed Soviet bureaucracy. Khitruk was an expert, clever craftman who liked to keep up-to-date and concerned.
'modern topics require a modern acting style,' he said about his characters, adding 'I do not believe there is an art which does not deal with social problems; and everything which deals with man is, by itself, a social problem.'

(이 다음부터 잘렸음)(잘린 부분은 괄호로 표기하고 덧붙입니다.)(교수님께서 보신다면 수정하거나 덧붙여주십시오)

Still, he is well rooted in tradition and i snot a revolutionary('My master is still the great Ghaplin,' he said. ' A director is impoverished if he does not turn children's tales from time (?) time.')

The Island(1973) and Icar and the Wisemen(1977)ha(??) a somewhat more preachy to (??) than his other films; Icaru(??) however, is and intelligent and cleverly indigna(?) film (Icarus attempts to fly despite the derision (?) the establishment and intellectuals who will (?) bury him with a eulogy). Another sincere film The Lion and the Bull, a warning against war (including nuclear war) which threatens break out between the two giant animals (?) they both bave been betrayed by a malefice creature.

the simpsons movie _감상후기


"TV에선 공짜로 보는 걸 극장 와서 돈 주고 보는 게 한심스럽다.
특히 당신!"
호머 심슨의 도발로부터 이 영화의 조롱과 풍자의 카타르시스가 시작된다.
그리운 조롱이고 비소이다.
지극히 냉소적이지만 그저 웃자고 하는 이 소리가 듣기 싫지만은 않다.
기존에 봐온 시트콤 형식의 시리즈와 비교하자면
볼거리와 내용은 TV판보다 확장되었는지는 모르나, 심슨을 처음 보는
불특정 다수 관객을 위한 배려도 내재되어 있어서 시리즈물보다 강한 맛은
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기발한 유머의 배치나
이슈와 트랜드를 능숙하게 캐치하는 패러디, 개성적인 캐릭터에서 느껴지는
정겨움은 그대로였지만.
개인적으로 심슨가족을 즐겨봤기 때문에 극장판 소식이 매우 반가웠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갈수록 의구심이 들게 되었다.
심슨가족의 기발한 유머는 여전하고, 이야기 구성도 유머러스하고
나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따끈따끈한 자극이 없었달까.
용기 있는 시도나 리터칭 보다는 기존의 장점을 여전히 잘 유지 하도록
하고 있고, 보다 극장에 어울리는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기존 팬들과 더불어 심슨가족이 생소할 수 있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 같은데 ..
이것은 탁월한 선택일수도, 안이한 고집이었을 수도 있다.
스케일이 커지고 길이는 늘어났지만, 이야기 구조 자체는 변화되지 않았다.
심슨가족 극장판에 대해 말하는 것에 비해 그 동안의 심슨가족이
미국문화와 대중문화에서 어떤 존재였는지가 더 언급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역사가 생각 이상으로 길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하자만,
아마도 심슨가족 영화에서는 센세이션한 무언가는 없다는 이유가 컸기
때문이 아닐까. 보다 다양한 것들을 더 추출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그들의 유머를 볼 수 있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할수 있다.
심슨가족 더 무비는 팬들을 위한 이벤트 영화인 동시에,
그들이 여전히 미국사회의 중요한 아이콘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데 대한
자신감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평이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지만,
결과를 떠나, 기존의 컨셉이 가진 목적을 잘 겨냥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2008년 11월 28일 금요일

『오세암』_200613144 박 민아

오세암
잘 만든 작품이다.
감정 이입도 잘 되고, 감독의 의도대로 표현도 충분히 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다.
작화 붕괴도 별로 없고 액팅도 나무랄 때 없다. 나름의 분위기도 잘 잡혀 있고.
기존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 중심에 불심을 집어넣은 것이 그나마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
한 편의 잔잔한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 보면서 눈물 뺀 사람도 꾀 있을 거다.
2004 안시 페스티벌에서 대상 수상까지 한 걸작 중 걸작인데..
유독 왜 흥행에 실패 했는가에 민감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작품 하나만 놓고 본다면, 칭찬받을 점이 더 많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의 성공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몸소 보여준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작품성과 완성도만으로는 어려웠던 것일까.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이 나오면 그 작품의 평이 재밌다 어떻다가 아니라 망했다 안 망했다는 것으로 갈리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가면서도 참 착잡하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관객에게 보여 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당시 극장 개봉 당시 열악한 스크린 수에도 불구하고 한국 애니를 살리자고 찾아가 본 분들도 꾀 되시고, 실제로도 괜찮은 작품이기도 하였으나 개봉한지 얼마 안 되어 일주일이라는 충격적인 개봉 기간을 세우고 소리 소문 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물론 나중에 이러한 대작을 묻힐 수 없다는 모두들의 서명 끝에 재 상영되긴 했지만.
신파라는 어르신들의 장르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흐름상 웃고 즐기려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아이들에게 적합하지 않고, 그렇다고 어른들이 쉽사리 표 끊기도 그러한.
확실히 관객의 연령대가 애매모호한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었긴 하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 작품의 경우를 보면 배급과 홍보가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얼마나 짜고 야박한지도 잘 알 수 있다. 그래, 제일 중요한 마케팅의 부재이다.
삼류 영화들은 개봉하기 전부터 광고다 인터뷰다 시끌벅적하게 해서 별 관심 없는 사람도 제목 내용까지 억지로 기억하게 하면서, 한 영화관 당 극장 여러 개까지 내주며 잘도 홍보해주면서 정작 이런 데서 고개를 돌리시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
개봉을 하더라도 하루 종일 해주지도 않는다.
오전 중에 상영해 버리고는 다른 영화 거는 거 번번이 봐왔다.
‘아치와 씨팍’ 때도 그랬다. 돈 벌려고 영화관하는 거지만, 정말 뭐 같다.
영화관이라는 거 관객 한 명을 위해서도 영화를 돌려야하는 거란 말이다.
작품에서 문제를 따진다면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운이 없었다고 밖에 말하고 싶다.
하긴, 당시 같이 개봉한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다 보니… 여기서 할 말 다 했다.
잘 팔리는 작품이라 하여 분석하고 도표 만들고 어느 정도 연구하면 꾀 그럴 듯한 논문은 나오겠지만, 사실상 따지자면 그런 작품이란 없다.
이렇게까지 하고, 그렇게까지 만들었는데 성공이 안 되더라.
중요한 것은 여기서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관객 수가 어떻든 간에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며 더 다양하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최종 목적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여기저기서 지원도 끊임없이 해 주고.
가야할 길은 멀다. 흥행 성공은 그길로 가는 동안에 얻는 부수입일 뿐이다.

오세암 200713034 양은영

오세암 200713034 양은영

2002년에 개봉된 애니메이션으로 그때 당시 개봉했다가 한국애니메이션 극장 판들이 그렇듯 다른 영화 상영기간보다 짧은 기간 상영되고 막을 내렸다. 그때 한국 애니메이션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나는 조용히 막을 내린 오세 암을 뭐 그렇겠지 하고 지나쳤고 그 후 2004 안시 애니메이션 그랑프리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세계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았다고 그 작품을 다시 띄워주는 것도 없었고 (아마도 오세암 상영 후 일 년 뒤 원더풀 데이즈에서 백억 이상 작업비가 들었는데 본전도 못 찾고 완전 망해 국산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심이 많이 사라진 여파가 그대로 이어가지 않았나 싶다.)그대로 오세암이란 작품은 나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가게 되었다.

그리고 케이블에서 불교 tv채널에서 오세암을 보게 되었다. 그 때 그 것이 오세암인 줄 모르고 본 나의 생각은 ' 아 종교애니메이션이구나 잘 만들었네.' 이었다. 2002년에 만들어진 것치곤 좀 오래된 추억을 살린 듯한 토속적인 배경에 내 어렸을 때 영화 속에 보았던 허름한 옷을 입고 나오는 소년과 소녀이 주인공이며 절과 스님이 나오니 이 애들이 나중에 뭔가 깨우치는 내용이겠구나 하고 추측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연신 닭살이 올라올 것 같은 대사와 마음은 따뜻해지는 것 같은 장면이지만 전형적인 장면들이 곳곳에 나와 보는 내내 조금 진부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또한 종교적인 색체가 전체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 일반 내용을 다루는 애니메이션보다 일반인이 다가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특유의 느낌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종교의 문제에 예민한 우리나라에서는 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힘든 소재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내가 기독교라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다루기 쉽지 않는 주제가 종교이며 우리가 가까이 가기 어려운 신의 사랑은 역시 표현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정을 신의 사랑으로 승화시키려는 발상은 독특하나 가슴으로 다가오는 점은 별로 없었고 (아무래도 원작 소설을 시각화 시키려니 글로는 표현 가능한 감정을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기가 어렵지 않았나 싶다. ) 보살이 죽은 소년을 데려가는 마지막 장면은 불명확한 주제성과 은비 까비나 옛날 옛적에 같은 우리 전래동화특유의 몇 십 년 전의 촌스러운 연출을 보여줘 이야기 흐름의 분위기를 깨뜨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아쉬운 점이 곳곳에 보였다. 희망을 잃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남매가 주인공으로 나와 소년이 인심 좋은 아주머니에게 인절미를 받으며 좋아하며 뛰어가는 모습이나 부모가 없는 어려운 환경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위하는 모습을 보며 성인층(특히 중년층) 관객은 현재 자신과 자신의 어렸을 때를 비교하면서 때 묻지 않았던 동심을 떠올리며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애니메이션의 주요 타켓인 어린이들에게는 부보님의 과거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과거 신파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이 오세암을 그렇게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 특유의 고전 신파 애니메이션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애니메이션들이 현재 미국, 일본의 보여주기만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가질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잊기 쉬운 따뜻한 무언가를 찾게 해주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그리고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sf판타지애니메이션에 손을 대서 망한 국산애니메이션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시대를 변해가고 있고 그 시대에 맞춰 지금의 어린이들도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면 그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 되었고 그 부분이 많이 안타까웠다.

아직 국산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길지 않으니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모가난 부분을 다듬으며 점점 앞으로 나아가며 한국만의 개성을 가진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 라는 목표에 연연하여 앞만 보고 달리는 것보다 주변의 상황과 타켓의 반응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계획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매번 실패의 고배를 마시는 한국애니메이션도 해가 뜰 날이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작품성과 상업성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으면 좋겠지만 일단 국산애니메이션에게 필요한 건 관심이며 흥행에 성공을 해야 위에서 투자를 하니 현재 우리 국산 애니메이션이 인식해야할 현실인 것 같았다.

오세암_____200710277 황내력

__________________오세암_____200710277 황내력

수업전에 <오세암>을 이미 본 적이 있다. 그때는 2003년 영상전공 들어 오기 전때문에 그때의 느낌이 별로 깊지 않았다. 수업때도 다시 보게 되었으니 느낌이 좀 이상하다.
일단 기술적인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움직임도 괜찮고 배경설정도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스토리부분에 대해서 너무 호감이 없다. 이 전에 한국 애니메이션은 스토리가 없는 것을 문제점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이<오세암>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정한 스토리가 볼 수 있다. 내가 생각에는 주로 이 스토리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가 너무 적당하지 않다. 우선 너무 슬픈 이야기때문이었다. 나만 이런 생각이 아니라 모든 관객들이 아마 다 이런 느낌이 우선 나왔다. 중요한 것 이 애니메이션은 주로 누구 한테(어느 연령층한테) 만든 영화라고 의문이 있다. 분명히 어린 애들이 보기에 좋지 않다. 어린 애들한데 물론 더 재미있게 행복한 결국(Happy Ending)이라면 더 어울린 것 같다. 우리 픽사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아무리 중간에 슬퍼도 결국은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이 아무리 숨 막히게 봐도 마지막에 다 풀 수 있다. 그러나 <오세암>이 그렇지 않다. 나는 일단 관객의 시각각도로 보면 슬픔이 끝까지 남고 있다. 그래서 나중에도 다시 그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우선 이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는 재미있어야 한다. 즉 사람한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대부분 사람은 음악을 듣거나 영화 보거나 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이다. 영화가 너무나 극단적으로 표현한다고 대부분 사람은 다쉽게 받아들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래도 애니메이션 속에 웃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좀 더 좋은 애니메이션은 재미가 있는 동시에 어떤 의미를 더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단 재미는 부분을 무릅쓰고 우선 의미를 고려하는 게 개인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세암>은 조금 이런 경향이기 때문에 많이 아쉽다고 생각한다.

200713046 진경미 /오세암

오세암은 상당히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한다.
감동과 재미가 모두 다 들어 있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상까지 받은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실패를 하고 가끔 케이블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되버렸다.
왜 그럴까?

일단 관객층을 잘못 잡은데 있기도 하다. 오세암이 20~30대 여성을 타깃으로 했고
아마 제작자들은 모두 성공할 것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익은 6억 천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왜 그럴까? 일단 대사가 참 남부끄러울 정도로 민망하다.
오세암이란 책을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입으로 읽으면 민망한 대사들이다.
그만큼 세대의 감수성이 그 시대와 지금 시대가 차이 난다는 것이다.

20~30대 여성이 아닌 40 후반 남성을 타깃으로 해야 팔리지 않을 까 싶지만.
전후세대인 40대 후반의 어른들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좋아 보일 리가 없는
매체다. 배고픈데 만화 애니메이션이 눈에 들어 오기나 하겠는가.

적당히 감수성을 10대에 맞추던가 20대에 맞췄어야지 오세암은 너무나도
촌스러운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후세대를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 반딫불의 묘와 비교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딫불의 묘는 시대가 옛날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러 세대에게 공감가는 모습으로 와닿고
있는데,

인물의 성격이나 말투, 행동이 그 나이에 딱 맞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나오는 소년은 생긴것에 비해서 너무 순진한 나머지 어떻게 보면
지능이 떨어져보이기도 하고 도저히 5살이라 볼 수 없는 성숙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누나는 그냥 엄마가 따로 없다. 누나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고 어머니의
희생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은 세대의 공감을 이끌기도 힘들고 추억을 회상하고자 하난 전후세대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힘든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트웍에 좀 신경을 썼으면 얼마나 좋을까?
동양의 정서인 만큼, 보여주는 곳이 불당인 만큼, 불당의 정갈함.
시시각각 태양과 계절에 의해 변화하는 산의 모습.
불교 미술의 화려함.

이 좋은 시각적 소재들을 그냥 퀄리티 다운한 것이 매우 아쉽기 그지없다.
보살님의 복장은 화려하고 매우 섬세하며 날렵하다.

그 멋을 살리지 못한것이 보는 관객 입장에서의 아쉬움이랄까?

그리고 특수효과에 대한 상상력을 좀 키우면 좋겠다.
소년이 득도(?)했을때 모습은 중요한 부분인데 우릴 웃게 만들었다.

좀더 성스럽고 고귀한 모습도 있었을 것이다.

연출효과나 퀄리티가 2002원더키디, 달려라 하니 이후로 나아진게 세월에 비하면
나아진게 그다지 없달까.

내용 좋고 캐릭터 디자인이 좋아도 관객은 보는것이 다르다.
일단 극장용다운 퀄리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발전에 비해 우리는 눈이 굉장히 높은것이다.

페스티벌에서 외국인들이 상을 주는것과 우리나라 극장가에서
관객이 돈을 내는 입장은 매우 다르다. 그점을 알았으면 한다.

오세암이 제대로 리메이크되서 나왔으면 하는것이 내 바램이다.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소재이기도 하며, 타깃만 제대로 맞춘다면
성공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200713047 천혜림 - 오세암 감상평


애니메이션 <오세암>은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故 정채봉 선생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던 원작을 순수함 가득한 가족용 애니메이션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한 제작진들의 노고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푸근한 한국 고유의 정서를 담아내겠다는 의지로 기획되어진 <오세암>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성장기가 담긴 서정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되어 많은 관객들의 관심 속에 표면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故 정채봉 선생 특유의 시적 표현이 상당 부분 살려져 있는 감성적 대사와 작품 전반에 깔린 한국적 신파극 형태의 정서는 작품에 대한 평가를 극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흔히 <오세암>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는 영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그리움이라는 감정, 한국적인 인물과 전경의 표현은 네러티브적 요소 및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 자체가 관객에게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의 가장 큰 비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오세암>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관객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연령대를 가늠할 수 없는 애매한 감성적 스토리에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게 하는 관객 또한 생겨나게 하였다. 확실히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기 전과 최근의 감상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관객의 반응과 평가가 극적으로 엇갈리기까지에는 감상의 시각적, 지식적 차이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오세암>이 극영화의 well-made적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스토리와 인물의 구조적 짜임새 및 전개가 주체적인 하나의 작품으로서 라기 보다는 전설과 원작의 재현에 좀 더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였기 때문에만 이해가 가능한 <오세암>이 가지는 한국애니메이션사의 커다란 의미 역시 주목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 유럽애니메이션 등의 자극적이고 화려하며 세련된 영상미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다소 부족하고 소박하게 다가왔을지 모르겠으나, <원더풀데이즈>와 같은 엄청난 제작비를 동행한 작품들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완성도와 영상미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많은 발전을 눈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어머니’라는 소재는 이미 한국인의 감성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소재이다. 영화, 만화, 문학을 통틀어 <오세암> 이전의 수많은 작품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가장 성스럽고 그리운, 한국인의 대표적인 고전적 향수의 표본이 바로 그것이다. 구성력 있는 전개와 심층적인 고찰이 이루어진 인물을 통해 이러한 소재를 표현했다면 시대를 아울러 모두가 동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진정 <오세암>이 추구하고자 했던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은 역시 개인의 감성에 의해 평가가 좌지우지 되곤 한다. 한 사람의 감성을 축적하는 것은 개인의 일생에 걸친 경험과 지식의 산물이다. 길손이처럼 어머니의 존재를 갈구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있는가하면, 밑도 끝도 없이 엄마를 그리워하는 길손이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오세암>은 모든 관객의 감성의 문을 열기에는 그 문턱이 너무 좁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직 자신의 감정에만 솔직한 어린 마음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지금은 간지럽지도 않은, 오로지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었던 창피하고 두려운 마음을 <오세암>을 보면서 조금 상기시켰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울려퍼지는 OST와 함께 그제야 수면위로 조금씩 울렁이는 아려한 향수와 추억은 오로지 <오세암>을 보면서만 느낄 수 있었던 행복이었다.

오세암 감상평 _200713019 김다희

( 오세암 100자 평)

그 시간, 그 공간 모두 내가 보고 느끼지 못했던 순간이지만 부모님의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친숙함이 느껴졌던 애니메이션이다.
아직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전통의 모습과 순박하게 웃는 아이들, 그리고 자연과 함께 어울려 해질녘까지 뛰어노는 시간들. 힘들어도 웃을 수 있었던 그런 순수함이 남아있던 시대의 이야기를 나는 동경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작품이 해외에서 상을 탈 수 있었던 이유도 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 순수하기만 한 나라의 사람들의 정서에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세암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화려함이나 흥겹고 재밌는 코믹적인 스토리는 잘 끌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순수한 감정의 호소력으로 그 어떤 나라도 표현하기 힘든 우리만이 가진 스토리텔링의 힘을 표현했다.
오세암의 중심적인 스토리의 진행은 ‘그림움’으로 압축할 수 있다. 길손이도 누나도 엄마와 서로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우리나라처럼 가족애가 강했던 나라가 있을까?
그들의 행동하나하나는 모두 가족에 초점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서로를 위해 변하고 배려했고, 서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가장 큰 슬픔을 느낀다.
이는 우리나라의 ‘한’의 정서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상을 표현했지만, 힘든 그들의 삶속에서 나온 ‘한’의 정서에는 전통과 슬픔, 배경이 묻어나온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나 생각했을 법한 ‘한’의 정서. 우리는 수업시간에 줄기차게 이 단어를 외우면서 문제를 풀어나갔지만 이 안의 의미를 이젠 이해하고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서에 움직였다면, 이건 하나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는 슬픔과 그림움의 마음이 존재한다. 이 모든 건 절대적인 진리인 사랑 안에서 파생되는 것이므로 연령과 국경을 넘어서 이해하고 공유할 것이다.
물론 이 애니메이션이 개봉된 시기나 결말의 아쉬움과 어색한 연출 이 애니메이션의 인지도와 완성도를 떨어뜨렸지만, 작품에서 낼 수 있는 가능성은 많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나라의 많은 전문적인 애니메이터 인력이 형성될 것이다. 그 때의 연출력은 틀림없이 크게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젠 우리만의 색체를 가질 수 있는 전통적인 정서를 포함해 작품성을 높이게 된다면 세계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00713029 성 영기] 오세암

그 애니메이션은 예전에 “뉴타입(Newtype)”이라는 애니메이션 잡지에서 뉴스를 통해서 토종 국산 애니메이션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캐릭터가 개인적으로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아서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보게 되었다. 사실 작품을 평가할 때 캐릭터부터 먼저 보고 작품을 감상하는 버릇이 있어서 인크레더블, 트랜스포머, 반지의 제왕, 라따뚜이 등등 특급 애니메이션만 고집해왔다. 어떻게 보면 서양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문화 사대주의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의 대부분에서 일본의 캐릭터 느낌이 지울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호감이 가는 캐릭터를 보면 화려하고 멋지고 인상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애니메이션 작품의 재미가 있겠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오세암의 등장은 내 머리 속에서 "소박함"으로 떠오른다. 요즘 애니메이션들 대부분이 화려한 판타지 세계 속의 ‘역동적(다이나믹)’이 인상적인 특징이 강하다. 나도 이런 특징을 갖춘 애니메이션을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오세암‘을 보면서 캐릭터보다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만한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캐릭터도 중요하긴 하지만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무엇가가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감동적인 소재가 많이 있는 것 같다. 누나는 동생 사이가 가깝고 친하게 지내면서 다정하게 살아가는 내용 속에서 많은 아픔과 슬픔이 함유되어 있다. 따뜻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적인 분위기가 살아있다. 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공감이 간다. 누나와 동생의 모습은 나의 모습들과 굉장히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각각 여러모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기술이 정말 뛰어났다. 하지만 단순히 감동적으로만 전개해나가며 보여주기엔 흥행애니메이션으로써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흥행으로 성공하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동적인 요소와 연출적인 요소 등이 여러 가지로 종합해서 조화를 이뤄야만 정말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야말로 세계적이라고 하는 말도 있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의 흐름에 따라가되 가장 한국적인 요소를 부가하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아쉬운 게 많은 애니메이션이었다.

200713025+김효은+오세암


한국 애니메이션_오세암






나는 왜 오세암이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는가? 에 대한 측면에서 조사를 해보았다.

우선 오세암의 코드에 대한 분석을 해보자. 오세암은 길손이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오세암의 주체는 엄마를 마음의 눈으로 찾고자 하는 길손이다. 그러니 그 속에 주제의식은 통괄적으로 엄마를 찾는 길손이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인공 길손의 시점에서는 엄마를 찾는 이야기가 길손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을 따라 산에 올라가는 이유 또한 엄마를 보기 위한 마음의 눈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길손이의 욕망을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길손이가 엄마를 찾는 욕망에 대한 타당한 근거 제시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에 엄마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길손이가 아기였을 때 엄마는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부분에 우리는 엄마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그 안타까움을 느낄 이유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장면 중에는 못된 아이 둘이 나와 길손이와 감이를 괴롭히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 나중에 못된 형제 둘의 엄마가 나타나서 길손이를 꾸지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쩌면 감독의 의도는 길손이가 엄마를 찾는 욕망에 대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단지 다른 아이들은 다 있는 엄마라는 존재가 나에게는 없다는 이유로 엄마를 그리워하고 엄마를 보기위한 마음의 눈을 얻기 위해 그 험난한 산을 수행한다는 것이 과연 관객들에게도 이해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남는다. 감독은 아이의 5세라는 이야기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는 하지만 길손이의 순수함과 아이가 엄마를 찾는 동기와는 연관을 짓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욕망의 장애물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스토리 구성에 필요 요소는 캐릭터의 욕망과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있으면 당연히 그에 대한 장애물이 있다. 또한 장애물은 애니메이션의 흐름과 구성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길손이가 마음의 눈을 얻기 위한 장애물은 어떤 것인가? 필자는 산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산행 속에 길손이는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역경을 견뎌 관세보살님에게 마음의 눈을 얻어 엄마를 볼 수 있다는 내러티브 구조를 가졌는데, 이 장애물은 애니메이션의 흐름에 맥을 끊는 단점을 보이기도 한다. 장애물이란 초반부터 암시와 복선의 과정을 거쳐 클라이막스 부분에 터트려 줘야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기 마련인데 산행이란 장애는 이야기 중반부터 너무 생뚱맞게 나온다.
스님이 길손이에게 산행을 제안하는 대화 이전에 그 산행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맞춰주어야 하는 산행(장애물)은 이야기의 맥을 끊는 단점을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관세보살을 만났을 때 이야기가 갑자기 나오고 강의실에서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이야기의 급전환에 대해 생뚱맞음을 느끼면 웃은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 장면에서 그런 이유로 웃었고 이 오세암을 본 수많은 관객들 중에 다수가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중에 길손이가 마음을 열어 엄마한테 가는 욕망의 성취는 감흥을 일으키기 어렵다. 우리는 그 전부터 길손이의 욕망의 타당성을 늦기지 못하고 그 욕망에 동요를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오히려 감이의 시점이 캐릭터의 주체성과 욕망표출, 그리고 관객들에게 주제전달에 효과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감이는 이미 엄마와 지내는 즐거운 나날들이 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그 회상 장면을 보면 감이의 엄마사랑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감이는 엄마의 부재를 알고 있으며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길손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캐릭터가 살아 있지 않음으로 인해 살아날 수 있는 캐릭터는 안타깝게 나타나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라는 존재를 믿고 싶고 그것을 얻기 위해 무슨 역경이라도 헤쳐갈 수 있으면 우리에게 좀 더 주제의식과 엄마의 그리움에 대한 연민을 얻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장애물로서 많은 설정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길손이가 감이가 엄마를 찾기 위한 장애가 될 수 이다. 엄마를 찾는 것과 동생을 돌본다는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내면갈등이라는 장애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구성보다는 캐릭터설정에 너무 초점을 잡은 것이 아닌가.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컨셉아트 부분에서도 아쉬움이 크다. 픽사 같은 경우는 모든 작품들이 다 한 제작사에서 만들어낸 작품이다. 하지만 그 작품마다의 컨셉은 각양각색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색과 명암과 구성에 대한 컨셉을 작품의 네러티브에 맞게 창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아쉬움은 바로 이런 점이다. 다른 회사 다른 감독의 다른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모든 작품들이 같은 그림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오세암 또한 그렇다. 그저 바다는 파랑색 구름은 하얀색 흙은 갈색 이런 색에 대한 단순한 생각만 있을 뿐 그림의 컨셉아트 부분에서는 다른 나라 애니만큼 생각을 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중국 애니메이션의 큰 장점은 바로 중국 애니라는 스타일이 나기 때문이다. 단순한 선의 느낌과 중국의 컨셉에 맞는 색체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요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림 컨셉아트의 중요성에 대해 알았으면 좋겠다. 한국 애니메이션을 성장과 주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그 작품의 퀄리티를 높여주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운드 구조에서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캐릭터의 성우라든가 노래라든가 우리 나라 정서를 살리기엔 좋았다고는 하나 너무 ‘달려라 하니’가 방송 된 옛날 시대에 초점을 둬 세대의 정서를 살리지 못한 것 같다. 특히 감이의 목소리와 대사 부분이 그러하다.
노래부분이 특히나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섬 그늘에’라는 노래는 애니메이션의 한국적인 분위기를 멋들어지게 살릴 수 있는 효과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감이의 성우다. 차라리 성우가 부르기 보다는 가수가 불러 촌스럽지 않고 멋지게 연출 할 수 있지 않았을 까? 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 애니메이션의 중요한 흥행실패 요인은 작품이 어는 연령대에 맞춰서 내용을 만들었는지 의문이 간다는 점이다. 어른을 공략하기에는 너무 스토리가 단순하고 아이들에게 맞추었다기 보다는 너무 진지한 스토리다. 차라리 아이들을 연령대에 맞추었으면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판타지라는 요소를 섞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울과 센과 치히로는 내용이 아이들이 보기엔 약간 복잡한 구성을 갔는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이유는 바로 판타지라는 요소 때문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마법들 그리고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귀엽고 캐릭터성 강한 귀신들, 이런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은 아이들의 동심을 얻는 애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세암에게는 아이들을 어필 할 수 있는 요소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보기에는 내러티브 구조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흥행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오세암은 한국 정서를 보여주기 위한 한국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마겟돈이라던지 블루시걸에 비해 우리 나라의 색체를 보여주려는 시도가 많았고 그 영화 속 액팅 또한 거의 세계의 프로급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한국 애니메이션을 발전 하기 위해서는 장점만을 찾기 보다는 단점을 찾아 그것을 보안하는 것이 우리의 큰 과제라 생각하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오세암에 대한 흥행실패에 대한 물음과 답을 구해보았다.

[200415400 이홍규] 오세암

‘오세암’ 100자평


영상과
200415400 이홍규




애니메이션 ‘오세암’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네티즌의 재 상영 운동’ 이었다. 대대적인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관객이 영화를 살리고 싶어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예산이지만 철저한 계획 속에 제작되어 주변의 높은 기대를 받으며 극장에서 개봉하게 된 오세암, 하지만 다양한 악재들로 인해 너무나도 일찍 극장에서 간판을 내리게 되었고, 네티즌의 요청으로 인한 재 상영 역시 결과는 역시 좋지 못한 편이었다.

안시 페스티벌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중 최고수상인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을 만큼 인정받은 작품이 왜 국내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일까? 일각에서는 멀티플렉스 극장들의 홀대와 횡포, 그리고 제작사의 홍보부족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작품 자체에는 그러한 요인이 될 만한 사항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지난주 수업을 통해 ‘오세암’을 감상하면서 느낀 거지만 이 작품은 다른 애니메이션들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 특성은 ‘오세암’에게는 궁극적인 단점이 됨과 동시에 장점이 되기도 해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주관적인 판단에 의거)

우선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은 작품을 감상한 뒤로부터 며칠이 지나면 아련한 감동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작 작품을 관람할 당시에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장점과 맞물려 심각한 단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실제로 처음 영화를 볼 당시에는 너무 인위적이고 통속적인 신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억지 눈물조차도 짜내기 힘들었다. 스토리 또한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은 원작과 고증이 존재하기 때문에 안정적이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넘어오면서, 판타지적이고 드라마적인 요소를 억지로 끼워 맞추듯이 표현하는데 에 있어 무리수를 두었기 때문에 씬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지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감상 후 며칠이 지나자 관람당시 아쉬웠던 요소들은 점차 잊혀 갔고, ‘오세암’의 한 장면 한 장면에 머릿속에 그려지며 길손이의 구슬프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내 기억 속 아련한 추억이라도 되는 양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난 아름다운 한국 고유의 색채와 정서를 담아내는데 성공했음에도 자잘하고 소소한 연출의 문제로 인해 그 옥석이 가려져 버린 ‘오세암’ 의 아쉬움과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만 치중해왔던 한국 애니메이션의 고질적인 문제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방법이 제시된 것 같아 무엇보다 희망적이고 기뻤다. 비록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다른 그 무엇보다 ‘오세암’ 이라는 작품이 빛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세암’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마침표가 아닌 쉼표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 고유의 문화를 통해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도처해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단기적인 수확을 바라기 보다는 점진적인 발전을 믿고 기대하면서 계속적인 노력을 한다면, 그렇게 우리가 마음을 다해 부르다 보면, 언젠가는 대한민국 애니메이션이 국내 관객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그날이 도래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슨 관련 인터뷰 (시네 21)

감독과의 대담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2003&article_id=47283

200513086_정현기_'한국적인' 애니메이션

오세암-'한국적인' 애니메이션에 대한 문제 제기.

한국 애니메이션의 위기를 이야기 하면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바로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단 애니메이션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산업 전반에 걸친 강박에 가까운 히스테릭이다. "한국적인 것이 바로 세계적인 것이다", "한국 문화를 세계로"라는 욕망은 정서상의 동정과 결합하여, '정말로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을 낳고야 말았다. 결과는, 해외에서는 호평, 국내에서는 참패이다. 그것으로 국내의 관객 수준이 떨어지고 해외에서는 통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비슷한 사례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들 수 있다. '서편제', '춘향뎐', '취화선' 등의 작품으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그 아우라를 국내에서 확실하게 기반 잡게 한 임권택 감독의 성공사례는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하다. 한국적인 색체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여주는 것이 성공의 열쇠인 양 만들었던 것이 오세암이다. 오세암의 개봉은 취화선과 맞물려, '한국 애니메이션을 부흥시켜야 한다' 는 관객의 동정을 사는데 성공했으나, 흥행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일부에서는, '한국 관객들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대함이 아직 모자란다' 라고 해석되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적인 문화와 정서, 색채 등에 있지 않다. 아무리 그런 것들을 영화 전반에 깔아놓아도, 이야기 구조가 받쳐주지 않으면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오세암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서 죽쑤었던 '원더플데이즈' 역시 비슷한 평을 받았다. 장면 장면 스틸만 놓고 본다면, '우리의 기술력이 많이 발전되었다' 라고 평을 받을만 했다. 하지만 극장을 빠져나오는 관객들은 입맛이 쓰다. 관객의 욕망에 이야기가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세암의 가장 큰 문제는, 사정없이 몰아치는 '서정성(마마보이 걸들에 관한 성장기)'도 있겠지만, 이야기 전체의 구조가 '신에게 회귀하다' 라고 결론지어지기 때문이다. 오세암이라는 종교적 특성이 강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리고 전설에서 차용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두 인간의 이야기이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욕망과 갈등을 그렸어야 했다. 하지만 관객이 애정을 쏟을만한 캐릭터성이라든가 욕망, 갈등, 좌절 등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부담감과 동정심을 동시에 가지고 극장에 들어가고 있다.

200713048 최민지 - 오세암을 보고..

오세암은 몇 년 전에 보고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작품이랄까? 다시 보게 되니 새로운 느낌이 많이 들은 작품이었다.
한마디로 버티기 힘들었다. 낯간지러운 대사와 어색한 acting...
솔직히 ‘좋다’라는 느낌보다는 ‘정말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선 보이는 것에서 따져보자면 Art work은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아주 괜찮았다. 솔직히 지금 봐도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멋지다.’ 또는 ‘꽤 괜찮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quality여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디즈니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움직임의 연기와 일본애니메이션의 엄청난 quality의 작품을 보다가.. 또 더해서 지금은 유럽의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오세암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만든 작품이어도 내게 culture shock를 준 이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은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할 말을 잃었다.

오세암을 보고 우리나라는 정말 스토리에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왜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에서 스토리가 이렇게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는 것일까? 솔직히 오세암은 스토리 면에서 많이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원작으로 보면 원작은 훌륭하다시피 아름다운 내용이었으니.. 하지만 적당히 각색을 하여 현대 시대의 정서를 담아낼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

오세암을 보면서 참 만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상의 요 장면은 이걸 쓰면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제작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는, 나는 관객의 입장이므로 잘 모른다. 이 분야에 기술을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직 2년이라는 배움의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이 작품을 똑같이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거만함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니 이 작품이 내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해본다. 세계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곳곳에서 다양하고 멋진 작품들이 수 천 개가 넘는 지금 이 세상에, 자부심을 갖고 만든 이 작품은 세계의 몇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고, 몇 사람의 존경을 받는 작품일까? 이렇게 만만하고 나도 만들겠다 싶은 작품이...

나는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작품이 이제는 개성을 타고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크게 대박을 터트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옛날 TV에서나 볼 수 있는 낡은 정서에 억지로 자아내어야 하는 듯 한 슬픔에, 딱 우리나라 고전적인 캐릭터들을 보면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일본의 캐릭터를 따라하라는 것도 아니고, 미국의 스토리 흐름을 따라가라는 것도 아니다. 그들처럼 자신들이 강조 할 수 있는 분야에 좀 더 힘을 실어내어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재미를 주는 작품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제발 억지로 쑤셔 넣은 듯한 슬픈 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좀 더 활기차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

오세암감상평 - 200713035오예승

오세암을 주제적 부분에서 인적은 느낌과, 그리고 작품 외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일단 참으로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원더풀데이즈가 아주 쪼금 더 재밌는 것 같다.
문화적 정서는 맞는데, 시대적 정서가 많이 안맞는 것 같았다. 80년대 신파 드라마를 보는 느낌? 오세암을 딱 보고 처음 떠오른 영화가 '엄마없는 하늘아래'이다. 물론 그런 분위기 때매 웃음도 짓게 했지만.
외국에서 큰상을 타온 것을 보니, 역시 서양인들 시각엔 이런 문화와 정서가 특별 한 게 다가가는 것 같다.
시각 적인 면에서 한국의 산수를 이쁘게 잘 표현 한 것 같다. 가을의 낙엽이 지는 울긋 불긋 한 산과 시내, 정말 한국적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히 오세암 제작진은 이 아름다운 화면을 얻기위해 산들을 이리 뒤지고 저리 헤매고 다녔을리라.
캐릭터 액팅이라던가 이런 부분들이 헐리우드애니메이션이나 일본의 애니메이션과는 확연히 다른점이 좋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엔딩이 참으로 마음에 안들었다. 정말 생뚱 맞았고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내 말은 엔딩이 '나쁘다'는 점이 아니다. 표현법이 맘에 안든다. 갑자기 영화가 환타지장르가 되다니 정말 황당할 수 밖에. 미리 부터 그런 복선이라든가 분위기가 깔려있었다면 마지막에 그렇게 신통을 깨진 않았을 텐데 싶다. 정말 마지막 엔딩의 그 표현법이 작품의 질을 완전히 깎는 것 같았다.
이것 저것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잔잔하고 훈훈한 국산 애니메이션이었다. 그 따뜻함이 참 매력적이다. 그건 다른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2008년 11월 27일 목요일

Jan Svankmajer-200415408 주성현

Jan Svankmajer에 관한 필름을 본지 어연 3주째 되는데도 그저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기말 발표 연구 주제와 관련되었다는 것도 충분히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이지만 결국 Jan Svankmajer의 뛰어난 영상적 충격에서 오는 기억 속 각인이리라 생각된다.
내가 생각하는 Jan Svankmajer의 영상적 충격은 정형성을 띈 오브제들의 비정형성에서 온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레 기괴함이나 혐오스러움의 표본이 되고 뇌리에 박힌다. 하지만 마냥 혐오스럽고 징그럽고 기괴하기만 하다면 지금의 Jan Svankmajer가 존재했을까. 영상안에 담긴 그 여러가지들의 느낌이야 말로 Jan Svankmajer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일 거라 믿는다. 각자가 느끼는 것들. 초현실주의적이어서 몽환적이든, 마냥 징그럽고 싫든, 좋든. Jan Svankmajer는 그런 여러가지 느낌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을 알아내려고 하기보단 느낌으로 알게되는 것. 어렵지만 이런게 Jan Svankmajer의 필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2008년 11월 26일 수요일

200713033 심영보 오세암


200713033 심영보


오세암


보는 내내 참 낯부끄러웠던 필름이다. 보통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유치한 상황 연출은 로맨틱한 장면일 경우가 많은데, 로맨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부끄러울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참고로 민망한 상황 연출의 대가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생각이 든다. 미야자키의 필름 속 로맨스는 어찌 그리 부끄럽던지... 센과 치히로의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 씬이나 아시타카의 ‘당신은 아름다워’ 씬은 충격과 낯 뜨거움의 결정체였다.)
오세암을 남부끄럽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대사이다. 대사 자체는 아름답다. 그러나 지나치게 소설적이다. 소설적인 대사는 소설 속에서는 어색하지 않지만, 영상에서는 다른 문제다.
소설과 영상의 가장 큰 차이는 시간성이다. 소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단 하루의 시간을 수십 권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수십 년의 시간을 한 권에 압축할 수도 있다. 주인공의 기나긴 독백을 읽으면서도 독자는 그 독백이 고작 5초 안에 떠올린 감상이라는 사실을 굳이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이 이렇듯 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자가 소설을 통해서 보는 것은 어느 누군가의 ‘기억의 기록’ 이다. 마치 일기장처럼. 소설은 독자의 시간을 장악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 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났던, 혹은 일어날 수 있는 누군가의 기억’ 으로 여기게 된다. 기억은 개인의 감정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1초의 순간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영원처럼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독자는 무의식중에 그런 ‘가능성’ 을 배제하지 않게 되고, 이것이 소설이 엿가락 늘이듯 시간을 주무를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영상은 다르다. 관객이 영상을 보는 동안에도 시간은 꾸준히 흘러간다. 관객은 주인공이 체험하는 시간과 자신이 영화를 보며 흐르는 시간을 동시간대의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특별히 시간과 관련된 연출이 삽입되지 않는다면, 시간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관객의 감정 이입은 끊어져 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면, 실제로 관객이 그 부분의 필름을 보는 시간 또한 짧아야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보통 데이트 장면을 표현할 때, 1분 안에 노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쉬움을 표현하지 하루 종일 노는 모습을 길게 보여주고는 “어머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라는 대사로 때우지는 않는다.
오세암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감이의 서정적인 대사는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인 상황 속에서 어울리는 대사이다. 그러나 감이는 그 상황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보내는 듯한 감성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관객에게는 고작 몇 초 만에 훌쩍 넘어가버리는 시간인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몇 초간 단풍잎좀 만져보았다고 시 한수가 절로 나오는 감이의 캐릭터성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그 이전에 감이가 감정을 이입해야 할 대상이 맞는지도 애매모호하다. 대체 누구의 시간에 관객의 시간을 맞춰야 하는가? 주인공은 누구인가?
오세암의 틈틈이 긴장을 풀어주는 개그요소라던지, 부처님의 입만을 보여주는 연출 등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싶었다면, 관객이 동조할 수 있는 명확한 주인공을 제시하고 그가 느끼는 시간을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도 저도 아닌 방관자적 위치에 놓인 관객에게 섬세한 감성적 대사를 들려준들 민망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뿐이다.

200713033 심영보

(이전 게시물에서 표트르 부분만 잘라옵니다.)

표트르...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효도르? 표트르? 러시아니까 표트르겠지?
처음 이 작가의 필름을 접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배송비를 맞추려고 끼워 넣은 삼천원짜리 DVD였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뭣보다도 이 사람 특유의 딱딱 끊어지는 동화가 인상깊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애니메이터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는 편이라 작가주의적인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기에, 시간도 돈도 넘쳐나는 사람들이니 유리 노르슈테인처럼 빡빡한 질감에 빡빡한 움직임이 많겠구나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외려 플래시 애니메이션 느낌에 가까운 담백한 느낌이었달까? 쿨한 액팅과 카툰적인 이미지가 잘 어울려서 깔끔하면서도 센스있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의 필름은 성우를 거의 쓰지 않는데, 특유의 액팅과 미쟝센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좀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표트르가 만들어낸 경쾌한 리듬과 화면은 러시아보다는 파리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필름이 러시아의 추위를 연상시키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라는게 또 하나의 재미있는 점이다.

2008년 11월 25일 화요일

레이블 수정해주세요~

레이블이 중구난방으로 되어 있어서 히트룩 작품은 '표도르 히트룩' 으로 레이블 통일시켜주세요~

2008년 11월 23일 일요일

오세암 감상후기_200713050_한수연


이 애니메이션이 개봉된 후 학교에서 DVD를 틀어주었는데,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이 공감 어린 진심에서 나오는 것보다
어색하게 다가오는 연기와 대사가 생소하고 당혹스러워 웃고 마는
것이어서 조금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수준 있는 퀄리티의 몽타주는 작품의 질이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또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잡아내는 카메라의 위치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오가며 순수하고 애틋한 감정을 부각시키려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감이의 입장에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설명된다는
점은 감성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맞물리며 발생되는 ‘심정의 물결’을
부추기며, 넓은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는 남매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또 찾아 해매는
부분은 그저 감상적으로만 보기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신선한 소재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겉치레에 그치지 않고
진심을 담고자 한 의지가 묻어나기에 그 의도만큼 굉장히
순수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산골 마을, 암자의 배경 이미지는 외로운 남매의 처지와 잘 맞물리며
부드럽고 섬세한 아트웍이나 섬집 아기의 멜로디는 감미로움을 더한다.

오랜 시간 눈 속에 고립된 길손이는 법당에서 계속해서 보살 그림에게
말을 걸지만, 어떤 도움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설정은 오세암이
인위적인 재미를 강조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연출된 즐거움을 벗어나, 원작의 재미에 인간적인 감수성을 담아
보편적인 정서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담아내려고 시도한 수작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서가 간간히 부담스러운 심파극의 형태로
비춰지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어린아이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어른스러운 형태의 대사나, 연기, (왠지 그러한 수준의
생각을 가진 아이가 유아적인 순수함을 유지한다는 설정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감정 선을 높게 책정하여 일반적인 정서와
이질적으로 생각될 만큼 절절한 장면연출은 감동을 넘어서
무안함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물론 인간적인 순수함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우리 애니메이션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감수성을 잘 표현 해 내었다고 느낀다.
다만 평면적인 형태에 그치지 않고 그 특유의 정서가
보다 더 감각적이고 현대적으로 다듬어진다면,
대사에서 짜내는 언어적인 감수성만을 떠나 작품전체의 미학적 가치를
증폭시키는 유동적인 호소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008년 11월 22일 토요일

표도르 히트룩 영상학과 200713034 양 은영

표도르 히트룩 200713034 양 은영

어느 범죄 이야기(1962)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데뷔한 표도르 히트룩은 러시아 애니메이션계에 한 획을 그은 감독이라고 한다.
1960년대 소비예트(소련) 연방 시대에 살았던 감독으로 그 시대의 정치상황과 나라의 현실에 대해 비유적인 표현으로 그의 생각을 담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인정받았다.
어느 범죄 이야기는 한 남자가 벌인 범죄와 그 범죄가 일어나게 된 이유를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시간을 돌아가서 그 일상을 보여주어 보는 우리들에게 직접적인 글로 표현 하지 않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보여주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생각해보게 하는 애니메이션이었다. 보기만 해도 다닥다닥 붙어있는 도형으로 이루어진 아파트에 사는 부지런하고 신사적인 남자는 취미가 화분 가꾸기이며 출근과 퇴근을 칼같이 지키며 일도 요령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틀에 맞춘 자신의 생활에 장애가 되는 요소가 있었으니 아파트에 같이 사면서 아파트에 사는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일만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남자는 지치고 피곤했던 일터에서 돌아온 뒤 자신을 위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 결국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의 생활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흉기로 때려눕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물어본다. 이 남자가 벌인 범죄는 과연 이 남자가 벌인 것일까?
스토리에서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 갈 필요가 없고 맨 마지막 결의 앞부분을 보여주고 나서 기승전결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 그가 말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주는 방법 같았고 종이를 오려붙인 것 같은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여 모든 형태를 도형으로 나타내었는데 와 닿는 느낌이 아기자기하여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도형들의 모습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어 일률적이며 획일적인 느낌을 받아 똑같으며 반복적인 일상의 모습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 애니메이션의 재미있는 점은 나오는 사람들이 대사를 사용하지 않고 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인데 주인공 남자가 위층에서 오디오를 시끄럽게 튼 남자에게 항의하러 말을 걸때 작아지는 소리와 그런 남자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말하는 오디오 남자의 큰소리가 악기 소리를 이용해 말하는 내용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지만 그에 대한 상황과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볼 수 있어 간단한 방법으로 오히려 대사가 있는 것보다 더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 되었다.
데뷔작인 만큼 작품에 대해 얼마나 요소 하나하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었으며 그 중 자신이 전달하려는 내용에 대한 소품도 여러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데 주인공 남자가 자려고 하자 위의 댄스 장에서 시끄럽게 춤을 춰 나중에 남자의 집의 액자의 사람들도 춤을 추고 남자의 시계도 춤을 추는 그런 요소나 밤중에 데이트 하는 남녀의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수도관에 연결 되어있는 벽난로(라고 추정되는)를 막대 도구로 치는데 그런 요소도 시끄러운 소리와 연결되면서 그런 장치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같았다.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위트가 넘치는 데 그 반면 후에 만들어진 액자 속에 사는 사나이(1966)는 좀 더 날카로워진 그의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처음엔 사회에서 입문하여 초라한 액자와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주는 주인공 남자는 계속 승진을 하면서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닮아가며 화려한 액자로 바꾸고 결국 자신만의 세상에서 자기만 위하며 살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화려한 액자 속에 갇히게 된다는 내용으로 액자라는 틀을 사회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이는 자리로 표현하여 다른 액자들의 위로 올라가며 만족을 느끼다가 결국 아무도 없는 곳에 자신혼자 담게 된다는 몇 가지 요소로 모든 주제를 뚜렷하게 보이게 하여 소재의 함축적인 의미를 아주 잘 사용한 애니메이션으로 기발한 아이디어에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또한 액자와 남자 그리고 어딘지 모르는 장소로 나누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문제에 대해 간결하게 보여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며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무리 다양한 미사여구를 동원해보아도 그것들을 포함하며 확실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소재와 그 소재와 주제를 함께 다루며 표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야기를 짜다보면 늘어지기 마련인데 그런 부분도 없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가 단편애니메이션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 그에 대한 감독의 기량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도 도형과 색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사회주의를 표현하기 위해 각진 네모형틀의 액자와 네모의 얼굴과 몸을 가진 사람들이 주를 이루어 딱딱한 느낌을 받게 하였고 또한 푸른색 계열의 색을 많이 써서 차갑고 냉정한 사회의 느낌을 받게 하여 시각적인 장치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200713027 남궁민승

개인적으로 얀 슈반크마이어의 작품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존경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뭐랄까.. 시각적으로 충격을 주는 방법을 잘 아는 작가중 하나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딱히 보고 싶어하지 않는 소재와 질감의 물질들을 차용함으로 보여지는 그 느낌이란. 그런데 너무 실제적이라 무어라 욕할 수는 없고, 보자니 더러운 기분이 들고.
슈반크마이어가 전하는 메시지는 언제나 단순하지만 그가 애니메이션 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특유의 기괴하고 잔인하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비주얼 때문이 아닐까. 그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을 이용해서 그것들이 가진 본래의 이미지들을 파괴해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바꿔버린다. 슈반크마이어가 부여하는 새로운 목적들이 그 물체들에 반영이 되고, 감독의 생각대로 더 기괴하고 괴상하고 괴팍한 물건들로 거듭나고.. 그래서 더 그의 영상이 섬뜩하고 무섭지 않나 싶다.


참 어떻게 보자면 슈반크마이어와 표도르는 극과 극을 달리는 작가다. 둘 다 어떻게 보면 심플하고 어딘가 맞닿아 있는 사회적이고도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썰을 푸는 방식이 판이하다.
슈반크마이어는 충격적인 비주얼과 극단적 내러티브로써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표도르는 보다 단순하고 친숙한 캐릭터와 비주얼을 사용한다. 슈반크마이어의 작품이 관중을 선동하는 붉은 띠 같다면 표도르는 마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같은 느낌이 든다. 어쨌든 표도르의 작품이 접하기에는 편하다. 그러면서도 가볍지 않은 주제를 능란하게 다룬다.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랄까.
어느 범죄자의 이야기는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사회 비판적이다. 개인을 억누르는 사회 - 사람으로써의 사회를 그려냈는데 누구나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자극적이지는 않다. 분명 이 스토리로 슈반크마이어가 연출했다면 필시 고깃덩어리들이 날아다니고 인형들이 나와서 난리를 쳤겠지만 표도르는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 외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의 영상은 변함없이 단순하고 귀여운 캐릭터들이 나온다. 액자.. 나 섬 등에서도 나타나지만 그의 그림은 일관적이다. 그러면서도 둘 다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주제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 이게 두 거장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쉬운 질문이 아닐까 싶다.

200710277 황내력

-----영상 학부_ 200710277_황내력

우선 러시아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이다. 이번에 본 애니메이션은 러시아 공산주의 시대의 역사를 바탕을 두고 내용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역사 내용은 그 대로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술 적인 수단으로 다시 창의한다. 그래서 작픔의 표현력과 풍자의 의미가 더 있다. 특히 캐릭터를 설계할 때 사람과 야수를 합쳐서 인물은 야수의 특성을 가지고, 당시 사회에서 사람들의 심리를 잘 표현했다.

물론 그 시대의 작품은 ‘움직임’에 대해서 덜 썼지만 애니메이션의 내용(information)에 대해서 오히려 더 확실하다. 이런 애니메이션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특점과 완전히 다르다. 디즈니처럼 움직임이 너무 유창하고 캐릭터의 얼굴 표정도 과장하고 스토리가 너무 간단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애니메이션은 완전히 다르고 캐릭터의 얼굴 표정이 거의 없고 움직임도 너무 단조롭다. 항상 포커스만 이동하는 것처럼 너무 간단하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감독은 오히려 더 자세하고 명확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작품의 순서가 더 분명하고 더 중요 한 것은 작품은 깊이가 있고 의의가 더 많이 있게 보이다.

역사와 정치적인 방면 뿐만 아니라 러시아 쪽의 애니메이션은 교육적인 방면에도 뛰어난 작품도 많이 있는 것은 볼수 있다. 이런 애니메이션도 재미 있고 보는 사람들한테 좋은 계시를 줄 수 있다.

우리 다 알다 시피, 러시아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그의 독특한 스타일과 매력은 여러 나라의 영화 펜을 정복한다. 러시아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고 영화의 특징처럼 우리 그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200713046 진경미 표도르 히트록

러시아가 소련이던 시절,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많은 발전을 해왔다. 아니 그 이외의 모든 문화가 발전했던 시기기도 했다. 단 그 당시의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상징적일 수 밖에 없었다.

창작자를 가두려하는 사회주의 사상자들의 방침과,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창작자. 이 둘의 대치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평범한 사람이 살인자로 변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회사에서 무미건조하게 평범하게 일하고, 그곳에는 어떠한 특이함도 자유도 없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상황이 그러하면 작품에도 자연스럽게 그 상황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주인공은 네모 반듯한 아파트에서 휴식을 취하기 원하지만 결국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후라이팬으로 소음의 근원지 중의 한 사람을 때린다.

휴식을 원했을 뿐인데 모두 그의 휴식을 방해했고 주인공은 그로 인해서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사회는 그 원인을 보지 않는다. 결과를 볼 뿐이다.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 사람 주위를 맴 돌며 시끄럽게 하는 사상가들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한 흐름을 타지 않은 주인공 또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잘못한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당시 험난했던 소련시절 통과 했다는것이 참 대단하다.

사실 겉보기에는 이웃에 대한 예절을 보여주는 미덕으로 교묘히 감싸놓았기 때문에 검열자도 그냥 넘어간게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개인적으로 사회주의 아래서 예술의 상징성이 심화되고 가치는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에 억압받는 와중에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자유를 상징화 시키는 모습과
사회주의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영상쪽에 거침없이 투자하는 사회주의자들.

사실 영화도 러시아가 소련이던 시절에 많이 발전했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200713046 진경미

얀 슈반츠 마이어의 작품을 보고 느낀것은 퀘이 형제와 비슷하다는 것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퀘이형제가 얀 슈반츠마이어를 존경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작품이 아주 기괴하고, 기분나쁘고, 혐오스럽기 까지 한 작품이다.
하지만 나중에 교수님의 설명으로 저기에 나오는 물건들이 슈반츠마이어가
어렸을때 가지고 놀던 물건을 사용해서 만들었다는 것에서 그 혐오스러움은
많이 줄어들긴 했다.

그리고 식인을 한다고 생각되는 모습에서 그것은 자신의 유년 시절, 어머니가 억지로
먹였던 음식에 대한 기억을 표현했다고 하니 다소 수긍이 가능한 장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부가 설명을 들어야 이해되는 장면이라면 이 사람의 작품은 지극히
관객을 위한 작품이 아닌 일기라고 생각 되지 밖에 않는다.
물론 실제 일기인것 같기도 하다.

그의 작품 앨리스 또한 혐오스러운 비쥬얼을 보여주었 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구리가 펄떡펄떡 뛰면서 파리를 잡아먹는 모습을 계속해서 반복해 오랬동안
보여준다던가.

하지만 적어도 퀘이형제와는 다르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상이란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또 부가적인 설명을 들어야 그 메시지를 이해하겠지만.

자신의 경험을 남에게 이해는 못시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그의 작품에 대해
창작자는 어떤식으로 이야기를 전해야 하나 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200713047 천혜림 - 표도르 히트룩


1960년대 작품인 <어느 범죄 이야기>는 평범한 소시민이 범죄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표현한 표도르 히트룩의 대표작이다. <액자 속의 사나이>와 더불어 그의 작품 속에서는 소비에트 사회의 문제점과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져 있다. 거대한 사회속의 고독한 존재인 바실리 바실리예비치를 통해 내비치는 소통이 부재한 사회와 모순. 그 고독감은 주인공의 고통을 이중으로 가중시키며 거대한 사회속의 저항할 힘이 없는 무기력한 존재를 향한 동질감이라는 공감대를 형성시킨다.


억압받는 개인의 권리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라는 심도 있는 메시지는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줄기와 인지를 크게 바꾸어 놓기도 했다. 어린이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기존의 러시아 민화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흐름과는 달리 <어느 범죄 이야기>는 사회 속에 사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체적인 진단과 메타포를 제시해 준다. 또한 기존 애니메이션의 재현과 묘사적 요소를 거부하고, 순수 형태의 구성을 취지로 한 구성주의적 형식과 콜라주 기법은 이러한 메시지들과 한층 더 부합하여 표도르 히트룩의 명성을 더욱 실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악명 높았다던 소비에트의 검열 속에서 애니메이션 역사의 빛과 소금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걸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극심한 경쟁 속에서 상업성을 그 생명력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예술과는 무언가 차원이 다른 소비에트의 예술. 무한정 공급되는 ‘당근’이 있었던 것도, 자유로운 창작과 표현이 보장되는 사회도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생계’ 그 위에 바로 작품이 존재했던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양날의 검처럼 보장과 제한이라는 두 저울이 팽팽하게 유지되었던 그 사회는 작가들에게 지옥이라면 지옥, 천국이라면 천국이 아니었을까?


유리 놀스테인(Yuri Norstein), 표도르 히트룩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정치 체제와 함께 그때의 문화를 싸잡아서 평가절하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어쩐지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 이들의 걸출한 예술작품들은 프라우다나 이즈베스티야같은 매체와는 또 다른 관객의 눈이자 새로운 환상적 텍스트의 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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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CK !: 한겨레신문 2004년 6월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4/06/009000000200406132224496.html

200713025김효은+표도르 히트룩


표도르 히트룩

어느 범죄자의 이야기

이 작품은 표도르 히트룩 감독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1960년대 소비에트 애니메이션계 전체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받았다. 이 표도르 히트룩이 세계에 관심 받게 된 계기도 이 작품에 의해서라고 한다. 이 작품은 평범한 소시민인 주인공이 살인범으로 변화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우서 이 작품의 스토리 텔링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어떠한 메시지를 남겨주고 싶은 것인가? 이 작품을 그냥 보면 그저 한 살인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은 애니메이션일 뿐이지만 그 속에 상징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사회구조와 연결 지을 수 있다. 주인공이 출근 하러 갈 때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패턴을 지키면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수 많은 사람과 규칙적인 행동들 이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세상을 상징하고 있다. 주인공 또한 초반에는 사회 속에 맞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 장면을 잘 나타내는 것이 주인공이 회사에서 일하는 장면이다. 반듯한 네모들 속에서 주인공과 그 동료들은 반복되는 행동을 한다. 그 어느 개성과 자유의 표출 없이 오로지 한가지의 목적으로 일을 하는 사회적 구성원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밖에는 네모난 건물을 짓는 공사가 있는데 그 건물들 또한 개성과 자유가 없고 목적만을 추구하는 다 똑같은 모양의 건물일 뿐이다. 하다못해 건물을 짓는 타이밍 마저도 일관되게 한다. 여기서 소비에트 시대적 상황을 나타내는 간간한 요소가 있다. 12월 28일까지 한해 작업량을 완수하자! 라는 슬로건이나 창밖의 건설 현장 맨 위층에 저축 은행에 예금합시다. 라는 광고문 등이 바로 소비에트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들이다. 이 모든 세상이 사회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표도르 히트룩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회주의 세상을 압축한 표본(상징물)은 바로 아파트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아파트. 이 아파트 속에서 주인공은 사건이 발생한다. 퇴근 후 주인공은 이제 자신만의 시간 즉 개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취미와 휴식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하지만 아파트 주민들은 한 차례씩 그의 휴식시간과 심지어 취침시간마저도 방해한다. 그렇게 수많은 스트레스로 인해 주인공은 물방울 소리와 자신의 심자박동 소리마저도 소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아침에 들려온 아줌마를 후라이팬으로 치는 살인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감독은 묻는다. 이미 범죄는 저질렀으니 이 주인공, 바실리 바실리예비치는 체포될 것이다. 하지만 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여기서 주인공은 아파트 내 시민들의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이다. 그가 만약에 이 그룹들 중에서(마작을 하거나 노래를 하거나 사랑 싸움을 하거나 등) 어느 하나에라도 속했더라면 그는 과연 살인을 일으켰을까?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면 그 죄목은 사회 속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파트, 사회주의적 소비에트 시대에 주인공은 사회주의의 폭력에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고 피해 받는다. 하지만 그가 같이 윗집사람들과 파티를 했더라면 그가 마작을 같이 했더라면 그가 사랑싸움에 참여했더라면, 즉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고 사회주의에 속했더라면 그는 체포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은 소비에트 시대에 사회 속에 속하지 않은 자는 국가에 의해 결국 체포된다는, 사회정권에 대한 폭로의 일면을 보여준다. 바실리 바실리 예비치는 거대한 사회 속의 고독한 분자다.
그는 사회주의의 무차별적인 권력에(소음)에 저항할 힘이 그에게는 없다. 사회의 목소리가 커 작은 그의 목소리에서 내뱉는 고통의 신음을 사회는 들지 못한다. 자신의 고통을 알지 못한 것은 주인공으로서 더욱더 큰 고통이 된다. 결론적으로 소비에트 시대에 작가가 겪은 어두운 면과 고통을 폭로하는 것이 이 작품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세계 속에 인정받는 요소가, 러시아 민화를 소재로 하거나 디즈니 만화를 쫒아가던 소비에트 시대. 웃기는 일만으로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이 메디어를 이 작가는 최초로 사회를 성찰하는 텍스트로 성장해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한 억압받는 시대 속에서 작가는 대담히 어느 범죄자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런 표도르 히트룩의 작가의식에 세계는 감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스타일적인 면에서도 혁신적이다. 기존 소비에트 애니메이션의 장식적인 효과와 사실적인 묘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콜라주 기법과 구성주의적 형상을 대담하게 사용했다(이런 기법이 사회주의를 실감나게 표현해주었다.).
이 작품은 또한 ‘작가주의’의 등장에 발판이 되기도 했다.


액자 속의 사나이

맨 첫 장면은 액자 속에 사나이가 탄생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 속에서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여러 종류의 ‘NO'로 만들어졌다. 부정어는 주인공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것은 소비에트와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소비에트 시대의 신상 명세서에는 대개 ‘아니오.’라는 대답을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예를 들면 당신은 반국가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전고가 있습니까? 등의) 위의 ‘어느 범죄자의 이야기’의 주인공과 달리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사회에 순응하는 자로 초점에 맞춰져있다.
주인공은 그런 세상의 순응하기 위한 부정어로 자신을 구성하고 액자를 만든다. 액자는 주인공에게 있어서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표출 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처음 주인공의 액자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주인공은 멋진 액자, 더 높은 계급을 향해 노력하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경쟁을 느낄 수가 있다. 그 경쟁은 굉장히 살벌하다는 것을 주인공이 남에게 가는 합격 통지서를 낚아채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더 좋은 액자를 갖기 시작한다.
액자는 권위를 상징한다. 그러니 그 권위 속의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그런 것에 불만을 갖지 않고 꾸준히 일을 한다.
그리고 그는 더 좋은 권력을 갖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한다. 여기서 액자 속의 사람들이 회의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계급사회의 면모를 나타낸다. 제일 높은 위치를 가직, 화려하고 큰 액자의 주인공이 오자 사람들은 박수를 친고 그의 한마디에 크게 공조한다. 사회 속에서는 유일하게 인정받는 것은 액자 뿐 인 것이다.
그는 점점 계급이 높아진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멋진 액자를 갖게 되지만 그에 비례해 점점 액자 속에 갇히게 된다. 액자는 권위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개성을 억압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기도 하다. 간간이 주인공이 바깥 세계와 소통하려는 장면이 보인다. 여자와의 사랑과 연을 날리는 장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위가 잃어버리는 것을 염려해 소통을 단절시킨다. 주인공은 최고층 사람이 되고 제일 멋진 액자도 얻게 되었다.
이제 그는 서류작성도 아닌 그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그의 승진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렇게 권위가 큰 수록 그 자신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끝내 액자는 그를 대신하게 되고 그의 의미는 세계 속에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액자는 권력과 권위를 나타낸다. 그리고 어떡해서라도 사회 속에 순응하려는 주인공을 통해서 그 시대의 사회를 풍자한다. 그리고 자신의 진정하 가치를 오직 액자, 권위에만 두려는 사회정치인에 대한 비판적인 면모도 보인다. 주인공은 개성의 표출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사회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색깔을 갖기를 원한다.
맨 처음과 마지막에 여러 실사 사진이 색색마다 나오는데 그것의 의미도한 위와 같은 뜻이 아닐까?

표도르 히트룩의 작품은 사회에 대한 비판과 혁신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억압받던 시대의 작가라서 그런지 그의 작품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런 그의 상징에 대해서 나는 사회주의와 정치를 작품과 연관시켜 생각을 해보았다.

표도르 히트룩과 얀 츠반크마이어_200713019 김다희

얀 츠반크마이어는 사상이나 작품의 연출의도를 알 수 없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의 연출능력은 작품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스탑모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든 그의 작품은 신비스러움과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주어 얀 츠반크마이어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 실로 그에 대한 영향력은 굉장했다. 팀버튼이나 퀘이형제 같은 대단한 감독들에게서 그의 작품의 향을 남겨 놓았다는 것만 보아도 알 것이다. 얀의 추억에서 만들어졌다는 시점으로 다시 바라보면 추상적이지만, 당시의 끔찍했던 심정이나, 미칠 것 같았던 상황의 전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표도르 히트룩의 작품은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진행시켜 말하는 바가 확실히 전달된다. 스토리의 연결성이 자연스럽고, 원인과 결과라는 측면도 잘 들어나 있다. 얀의 작품이 초현실주의적이며 당시 상황에 비해 판타지 세계와 미래적인 느낌을 준다면, 표도르는 캐릭터의 절제된 움직임과 색체의 표현은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느낌을 주었다. -미국과 일본이 강한 색체와 캐릭터의 자극성이 강한 애니메이션이라면 러시아 애니메이션은 부드럽고 단조로운 느낌의 애니메이션이란 느낌이 든다.

두 감독은 애니메이션 진행 형식이나 보는 관점을 달리 표현 했지만, 그들의 고유한 정서나 색체를 확실히 전하는 마력은 몇 세기를 지나도 지속 될 거라 생각 한다.

200713040 이유진

순수해 보이는 피사체 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기괴한 행동을 하고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무섭다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다.
이러한 상황이 당연하다는 것 처럼 덤덤하기 까지 하다.
이런 점에서 얀 슈반크 마이어의 작품은 꿈과 닮아있는 것 같다.
꿈 속에서는 그 어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연출 되어도 그것이 당연한 일이고, 별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나중에 깨어나 꿈을 다시 돌이켜 보면 무서워 진다.
왜 꿈은 무의식의 표출이라고들 흔히 말하지 않는가?
그럼 나의 무의식에는 어떤 인식이 바탕으로 깔려 있길래 꿈 속에서 그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 들인 것인지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가 징그럽게 느껴진다.
나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가 혐오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려 하고 부정하려 하지만 얀 슈반크 마이어의 작품에서는 그런 부분을 적나라하게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보면 흔히들 듣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작품에선 자신이 드러나게 된다고.
나 또한 이 말에 공감한다. 그래서 때로는 내 그림으로 내가 벌거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림을 그린다.'라는 행동 자체에 현기증을 느낄 때도 적지 않다.
때로는 일부러 내 자신을 숨기는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기도 한다.
보통은 실패로 끝나지만 아닌척 하는 정도의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감추고 죄인을 만드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정말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는 점이 한없이 대단해 보이고, 동시에 얄미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얀 슈반크 마이어의 작품을 볼 때면 이유 모를 불쾌함이 드는 것 같다.

[200415400 이홍규] 표도르 히트룩

표도르 히트룩


영상과 200415400 이홍규



1962년생인 히트룩은 ‘어느 범죄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평면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앵글 연출은 ‘유리 놀슈테인’과는 또 다른 독특함을 선보였고, 당시로선 획기적이었을 팝아트적 색감의 사용과 콜라주 형태의 군중 표현은 그의 이름 뒤에 붙은 수많은 찬사의 수식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자연스러운 줌인이 아닌, 과감하고 절도 있게 사용되는 클로즈업은 소비에트 당시의 권위와 탄압의 상징이었던 경찰을 표현해내기에 충분했고, 화면사용도 컷 형식으로 독특하게 레이아웃을 구성함으로서 캐릭터가 마치 컷을 넘나드는 것과 같은 재미있는 구성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액자식 구성의 연출을 통해 주인공 남자는 작품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관객과 함께 다른 사건에 대한 관객이 되기도 해서 실제로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묘한 동질감과 교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작은 장치와 요소들은 그 작품이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다방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러시아 특유의 캐릭터 디자인을 통해 그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해내기도 했다.

이 ‘어느 범죄의 이야기’는 ‘바실리 바실리예비치’라는 주인공을 통해 소비에트의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주인공은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집단속에서의 고독한 소시민이다. 낮에 보이는 그의 일상은 아주 보편적이고 평범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지루하게 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밤이 되면서부터 수많은 악재들이 그에게 닥쳐오게 되고, 그 원인은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의 이웃들이다.

평범한 소시민을 극악무도한 살인마로 변하게 만든 것은 절대 어떤 특정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주위에 있는 수많은 이웃들은 평소에는 온화한 얼굴로 태연자약한척 하고 있지만, 주인공이 소음에 대해 항의를 하고 거부의사를 표할 때마다 집단적으로 그를 배척하고 무시 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구성원들의 인식에 대한 문제점을 주인공과 기타 인물들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어린이들의 즐거움거리에만 국한되었던 애니메이션의 한계점을 뛰어넘게 하였고, 사회적으로 애니메이션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매체라는 것을 증명해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액자 속의 사나이’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액자로써 그 캐릭터의 지위나 성향, 성격을 표현한다는 발상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것을 통해 사회적 체제의 문제점과 그로인한 권위, 물질 만능주의에 일침을 가하고자 했다는 것이 느껴져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각 직위별로 액자 디자인이나 액자 속 사람의 옷차림, 표정 등이 다르게 표현되었는데, 지위가 높아져서 액자가 점점 화려해질수록, 캐릭터의 인상이 점점 삭막해지고 행동마저도 비열하고 이기적으로 변해갔다.

이 작품을 통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회주의 관료제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표도르 히트룩의 작품에서는 항상 사회적 문제의 비판 이외에도 인간 본질에 대한 고찰도 느껴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내면의 욕망에 대해서도 고민해왔고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애니메이션에만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큰 이상과 꿈으로 갈망하고, 작품을 통해 성취해왔던 그의 모습이 존경스럽게만 느껴졌다.

[200415400 이홍규] 얀 스반크 마이어


얀 스반크 마이어

영상과 200415400 이홍규



그의 작품은 기괴하고 독창적이며 인상적이다. 물론 이 표현엔 무조건적인 긍정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록 팀 버튼, 테리 길리엄, 퀘이 형제에게 큰 영향을 준 거장이라 할지라도, 그의 작품은 내게 혼란스러움과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어느새 내면에서 둘로 나뉘어 그의 작품을 나름의 주관에 의해 해석하게 된다.


우선,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그의 작품 ‘자바워크’에서 새끼 인형이 어미인형의 몸속에서 나오고 마치 거미인양 어미를 먹어치우는 식의 연출이나, 새싹이 돋고 나무가 자라 열매가 열렸는데 그 안에 온통 구더기가 들어있는 씬의 경우에는 혐오스러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2000년도 작품인 ‘Otesanek’에서는 그 수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사람모양의 나무뿌리가 아내의 사랑을 받아 실제 살아 움직이게 되어 고양이나 사람을 처참히 잡아먹는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일반적인 정서와 통념을 넘어서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성으로 다가오기보다는 그 외의 부정적인 감상들이 앞서, 본질적인 메시지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는 듯 했다. 물론 이것은 나의 경우에 국한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과도한 잔인함과 징그러운 표현법은 아무래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다른 한편에선 그만의 독보적인 장점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장점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강하게 각인되었다. 일반적인 통념을 철저히 깨부순 그의 천재적인 연출과 거침없고 과감한 표현방식은 ‘자바워크’에서는 옷에 불과한 와이셔츠를 살아 춤추게 하고, 그 빈 소매에서는 병정들이 나와 행군을 하는 등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모순적이고 희한한 오브제들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그 스타일은 위에서 언급했던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큰 자극이 되어주었고,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얀 스반크 마이어는 고유의 경험에 생명을 불어넣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생각보다 놀라웠다. 그의 작품에선 먹는 것에 대한 행위가 자주 드러나는데 그것은 유년시절 허약한 아이였던 그에게 부모가 음식을 강제로 먹이곤 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의 무의식적인 표현이었다고 한다. 또 그 때문인지 그는 음식(食)에 대해 문명의 심벌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창작자에게 있어 경험이 얼마나 소중하고 위대한 자산인지 그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비록 그가 가지고 있는 표현방식에 있어 익숙하지 않고 생소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스타일에서 풍기는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호기심과 상상력의 향취는 그것을 감수해내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액션에 굳이 경계를 두지 않고 그것들 모두를 그저 생각에 대한 표현방식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그를 통해 너무 작은 것에만 얽매여왔던 나의 좁은 식견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713048 최민지 - 얀 슈반크마이에르 JAN SVANKMAJER

-JAN SVANKMAJER는 등장하는 인형들을 왜 그렇게 비추었나...

그의 작품은 언제나 내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면서 괴상한 충격을 주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의 작품을 보자면 멀쩡한 것이나 예쁜 것(인형 따위의 것들)을 잘 보여주는가 싶으면 나중에 잘게 토막을 내어 먹여버리던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해서 그 사물 자체의 존재감을 괴상망측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표현을 보자면 어릴수록 잔인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 사람의 정신세계는 동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다. 세계관은 어린아이같이 꿈에서 본 것 같고, 환상의 세계 같으면서 현실에 의존 되어있으며, 그래도 그 세계에는 아직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과자, 등이 있다. 그러면서 그것들에 반응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잔인하면서 순수한 면이 있다.

Jan Svankmajer의 어릴 적을 보면 이 인간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어린 피해자 중에 하나였다는 면에서 그의 작품을 보면 나름 그의 작품들이 왜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었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 번째 경우, 모든 것이 파괴되는 전쟁에서 그는 자신이 아끼던 것들을 잘 보관해도 산산조각 나거나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을 때 그의 작품은 산산조각이 나있거나, 본래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 모습의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에 나름 이해가 갈 수 있겠다. 그의 무의식중에 전쟁 이후에 본 것들처럼 예전 모습과 같지 않는 모습을 본 것을 그대로 표현 한 것일 수도 있을 테니..
두 번째 경우, 자신이 예쁜 인형이나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았을 때 전쟁의 참혹함 따위의 충격을 받았다면 그 인형은 자신을 지켜주는 soul mate 같은 존재이면서 자신의 친구가 아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중적인 면을 가진 물건들은 처음에 잘 표현했다가도 또 다른 제 2의 모습이 연상되었을 때 그는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형들의 모습이 토막 난 채로 그의 두려움을 표현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인물에 대한 발표를 맡은 조의 조원으로써, 또 그를 존경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이해를 하고 싶은 한 명의 사람으로 그에 대해서 써본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200713045 주은아

유리 노르슈테인은 러시아 애니메이션 작가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따스한 시선이 좋고, 그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상들과 움직임에서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유머가 좋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도 그러한 그의 특징들이 잘 드러난 작품이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성격이 보인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단순히 아름답고 즐거운 동화를 보는 기분으로 봤던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기 때문인지 더 깊이가 있었고, 더 많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말하는, 그러한 작품의 가치를 직접 보여준 작품이다.

상업 애니메이션들의 작위적인 결말들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같은 결말이 더 공감이 간다. 개인의 시점이라 그런지 '이야기 속의 이야기'에서 드러난 생각이 자연스럽고 인각적으로 다가온다.

얀 슈반크마이어, 표트르

(편의상 레이블은 얀 슈반크마이어쪽으로 넣겠습니다)

200713033 심영보


얀 슈반크마이어

얼마 전에 다른 과목에서 영화 장르 연구를 한 적이 있다. 그 과제 덕분에, 얀 슈반크마이어의 필름을 보자마자 나는 그의 작품 장르를 바로 간파해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컬트 애니메이션이로구나!’
그 때, 장르연구에서 내가 찾아낸 컬트영화의 공통점이 죄다 적용되었던 것이다. 첫째, 광인의 정신세계를 표현할 것. 둘째, (광인의 시점을 선택한 당연한 결과로)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느낌이 들 것. 셋째, 그 와중에 임팩트를 줘야 하는 부분은 수위를 넘는 잔혹성(또는 성적 표현)으로 강조할 것.
얀 슈반크마이어 필름의 광기는 피터팬 콤플렉스에 집약되어 있다. 이것 또한 컬트영화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많은 컬트 필름들(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프릭스, 성스러운 피 등등)이 주인공의 정신적 정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성적인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동물적 폭력성을 제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며, 동화적인 세계에 둘러싸여 영원한 유년기에 표류한다. 피터팬을 주인공으로 세운 컬트영화들이 섹시한 표현을 자제하고 대신 피나 살점으로 강조효과를 노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장난감은 깨끗하거나 현대적이지 않다. 대부분 녹이 슬어 있거나, 얀 슈반크마이어의 경우는 깨끗하지만 구식 느낌의 인형들을 사용한다. 이런 낡고 망가진 소품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동화적 취향과의 부조화이다. 정신은 유아기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지만, 육체는 어른의 세계에서 소모당해 낡아 떨어지고만 느낌이다. 화려한 화면 속에서 피폐하고 결핍된 정신이 엿보인달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이런 유아기로 퇴행하는 느낌에 감정이입하고 좋아하니 참 큰일이다.


표트르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효도르? 표트르? 러시아니까 표트르겠지?
처음 이 작가의 필름을 접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배송비를 맞추려고 끼워 넣은 삼천원짜리 DVD였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뭣보다도 이 사람 특유의 딱딱 끊어지는 동화가 인상깊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애니메이터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는 편이라 작가주의적인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기에, 시간도 돈도 넘쳐나는 사람들이니 유리 노르슈테인처럼 빡빡한 질감에 빡빡한 움직임이 많겠구나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외려 플래시 애니메이션 느낌에 가까운 담백한 느낌이었달까? 쿨한 액팅과 카툰적인 이미지가 잘 어울려서 깔끔하면서도 센스있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의 필름은 성우를 거의 쓰지 않는데, 특유의 액팅과 미쟝센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좀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표트르가 만들어낸 경쾌한 리듬과 화면은 러시아보다는 파리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필름이 러시아의 추위를 연상시키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라는게 또 하나의 재미있는 점이다.

2008년 11월 20일 목요일

판타지아 . 표도르히트룩 감상평 200713024 김혜수

판타지아


판타지아를 처음 접하게 된건 고등학교 미술시간에서였다.
그때는 사실 애니메이션 동화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어서 판타지아를 봐도 별로 놀랍지 않았고 클래식과 합치다보니 심지어 졸리기 까지 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과 2학년이 되어보니 판타지아 뿐만 아니라 디즈니 애니메이션 자체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움직임'이란 것은 정말 어렵다. 아무것도 없는 작화지에 선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드는 것도 그렇고 음악과 싱크를 맞춘다면 더욱 그렇다. 캐릭터에 감정을 넣어 걷는 것을 그릴 때도 고뇌했었는데 얼마나 많은 작화지를 쓰고 그리고 또 그려야 판타지아 같은 움직임이 나오는 것일까?
판타지아를 보면서 좀 놀라기도 했다. 미키마우스 같은 상업적인 캐릭터만 다룰 것 같던 디즈니가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가히 경이로울 만한데, 아트웍에서는 아쉬웠다.조금 더 그 음악을 돋보이게 해주는 아트웍이 있었을 텐데, 단편적인데서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예술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 네러티브가 재미있었더라면 예술과 상업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표도르 히트룩


표도르 히트룩의 애니메이션은 전 학기에 '필름필름필름'을 보고나서 감명 깊어 여러 개 찾아본 적이 있다.그 애니메이션들을 다시 보니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이해가 잘 되었다.
표도르 히트룩 특유의 리미티드하면서도 통통 튀는 액팅이 인상적인 '어느 범죄 이야기'는 아기자기한아트웍과함께 캐릭터들의 말소리나 움직임이 음악으로 표현되는 게 좋았다. 대사로 전달하지 않아도상황과 음악의 높낮이 악기의 굵고 가늠에서 어떤 캐릭터가 어떤말을하고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런 사운드는 애니메이션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액자 속의 사나이'는 간결한 캐릭터와 배경 속에서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어서 좋았다.
이 애니메이션 역시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음악과 색이 적절하게 쓰여 캐릭터가 전하려는 바를 알 수 있다. 사진이미지를 애니메이션사이에 넣은 것은 약간 이질적이었다.
물론 필름필름처럼 오프닝만 사진으로 나오는 건 괜찮았지만 액자 속의 사나이에서는 사진이미지가 애니메이션과 이어져서 아쉬웠다. 러시아 애니메이션은 추상적이고 어려운 이미지 이었는데 표도르 히트룩을 알게 된 후로 러시아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었다. 표도르 히트룩의 애니메이션은 철학적이거나 풍자적인 주제가 많이 나오는데 그것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물론 무거운 주제이니 만큼 결말은 좋지 않지만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한다.

Jabberwocky(1971)감상후기_200713050_한수연

Jan Svankmajer-jabberwocky(1971)

어린시절 녹화해 둔 홈비디오를 대학생이 갓 되어 다시 틀어본 기억이 있다.
보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어두운 구석 한켠에서 떠오르는 추억도 있다. 어린마음에 온갖 괴상한
상상을 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스케치 북도 옷장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jabberwocky(1971) 를 보면서, Jan Svankmajer는 아마도 이런 느낌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jabberwocky라는 시가 있는데, 버려진 인형이 되살아나
돌아다닌다는 내용이다.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소꿉놀이 인형과 장난감병정들이 예전의 기억을
재현이라도 하듯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 속에는 작가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소소한 기억과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숙제공책을 찟어 종이비행기와 배를 접었던
기억이나, 작은 조각칼에 손을 베어본 일은 나도 경험해 본 것이다.
결코 평범한 작품이 아니지만, 사실은 누구나 가졌을 법한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감을 느낄 수 있다. 본디jabberwocky라는 단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말처럼 뒤죽박죽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딱히 전개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기억의 조각들이 스쳐가는 느낌을 잘 묘사 해낸다.
옷장속의 옷이 Svankmajer의 추억이 담긴 매개체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검은 고양이는 드문드문 떠오르는 공포스러운 기억들,
괴기스런 상상의 형상화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장과 동시에 추억도 봉인되어 머릿속의 기억으로 자리잡는다.
Jan Svankmajer의 작품들에서는 거의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볼 때마다
그 독특한 오브제의 기괴한 매력이 느껴진다. 단순히 외형적인 면만을 떠나서
낡은 가구, 칙칙하고 어지러운 목재바닥, 때가 낀 얼룩무늬 벽지, 기이한 문양과
환상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무대세팅에서 느껴지는 색감이나 분위기 또한 그
독특하고 환각적인 느낌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특별히 복잡한 내러티브나 연출없이도 작품의 뉘앙스를 잘 포착 해 낸다는
점에서 표현방식 또한 매우 효율적으로 보인다. 무생물이기에 살아움직임이
오히려 더욱 기괴스러운 오브제들의 무대는 자장가처럼 들리기도 하는
기묘한 음악과 어우러져 꿈인지 현실인지, Svankmajer의 훌륭하게 이미지화된
미장센들로 채워지고,공포스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추억속으로 떠나는
여행의 분위기를 가진다. 움직이는 미술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미지적인 구성이나 재현이 기발하면서도 꼼꼼하게 채워져 있다.
낡은 사진첩을 넘기면서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이미지에 대한 시각적 구성이
작품 전반을 암시하는 어떤 주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원령 공주 200710277 황내력

<원령공주>캐릭터에 대한 분석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자연, 자연 대 자연 이 속에서 아시타카와 산은 중재자다. 아시타카는 인간 대 인간의 대립에 대한 중재자이며, 산은 자연 대 자연의 대립에 대한 중재자이고, 이 둘은 자연대 인간의 대립에 대한 중재자다.

아시타카는 인간 사회에 살아왔으나, 조상들이 권력으로부터 배제되어 자연 속에서 자연신을 믿으며 살아온 사람이며, 산은 인간사회로부터 버림 받아 자연에 맡겨져 키워진 사람이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나타난 중재자들과는 그 존재 형태부터 많이 달라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한다. 즉, 나우시카, 라나 등은 인간사회에서 자랐으나 자연과 완벽히 교감하는 존재였으나, 이 작품에서는 양 세계에 대해 완전히 교감하는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 결말에 단적으로 나타나는데, 아시타카는 제철소에서 산은 숲에서 산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결국 인간사회는 아시타카를 필요로 하며, 자연은 산을 필요로 한다는,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중재를 위해 이 둘은 여전히 중재자로 남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지... 이는 또 미야자끼의 고민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즉, 둘의 노력에 의해 사슴신은 숲속의 생명으로 환원되며 자연과 인간의 대립은 일단 끝났지만, 아직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 끝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둘은 서로의 살 곳을 서로 갈라 놓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애매함을 하나 놓아 두는데, 그 마지막 대사, 야크르를 타고 산을 만나러 숲으로 가겠다는 아시타카의 대사와 이에 대한 산의 대답이 그것이다. 결국은 공존을 택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산과 아시타카가 서로 다른 곳에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대립이 끝나지 않았다. 아시타카가 산을 만나러 가겠다는 것은 공존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결국 하야오는 이 작품에서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결국 문명에 대한 경향적 거부와 자연친화적 사상을 그의 애니메이션에 투영시켜 왔던 그가 인간 사회 내부의 문제를 진지하게 접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고 그런 애매한 공존이라는 형태릐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었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200713048 최민지 -원령공주100자평-

미야자키의 작품들을 보면 언제나 인간과 자연에서의 갈등이 잘 보여진다. 과도하면서 말그대로 인간중심적인 세계를 개척해 가는 사람들에 의해 원래 있었던, 같이 공존해야만 하는 자연물들이 상처를 받으며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상황을 보여주는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는 그러한 인간들과 자연물의 대립이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 작품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미야자키의 작품들을 통해서 느끼는 바는 항상 같다. 단순히 생각하면 '과한 욕심은 버리고 자연을 아끼자.'라는 것이다.인간은 왜 그렇게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살기위해라는 변명을 하는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시시가미 (내가 생각하기엔 숲(자연) 그 자체라고 생각된다.)의 존재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우리는 보통 배우기로는 자연과 인간은 하나, 자연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고 배웠다. 그런데 살기 위해 자연이라는 것을 파괴한다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지금 사회를 비판이라도 하는 듯 미야자키는 그렇게 인간들을 묘사했다.

미야자키의 작품들을 많이 봐왔고, 지금도 보고 있고, 그의 작품이 기억 속에 남으면서 어느 새 미야자키의 작품에 대해 글을 쓰는 나는 미야자키가 말하고자 하는 자연이라는 것은 약하면서도 강한 의지가 있으며, 인간들과 함께 공존하면서도 다투는 존재로 알고 있으며 또한 그가 묘사한 자연이라는 존재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간에 대해 정말로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원령공주에서 이야기 할것은 내용에 내포되어있는 감독의 생각 뿐만 아니라 그 작품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것이 많다. 정말이지 애니메이션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한번정도는 그의 작품을 안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중학교 때 센과치히로를 보는 순간부터 애니메이션으로 장래를 정한 나로써는 그는 내게 전설적인 존재이며, 언젠가 꼭 뛰어넘고 싶은 존재이다. 그런 그의 작품 퀄리티는 뛰어나며 음악 또한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것이 그의 완벽성에 존경스럽다는 생각이든다.

모노노케 히메 200713046 진경미

이것은 기존 지브리에서 보여주는 남자주인공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코난, 라퓨타등은 성숙한 여주인공과 미성숙한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성숙하고 강한 남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때문에 모노노케 히메는 당시에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것으로 인해 이 작품의 스토리 밸런스가 많이 망가졌다는것을
지금 보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설픈 남성상으로 인하여 우리를 코웃음 치게 만드는 아시타카의 모습.
예를 들면 죽어가는 순간에도 산에게 <당신은 아름답소> 하는 모습이
그것일 것이다.

또한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너무 강했다는게 문제다.
남성성을 가진 강한 여자 에보시와 야생의 모습을 가진 소녀 산은
아시타카의 어설픈 남성성에 비하면 굉장히 매력있고 크게 다가오기에

정작 이야기를 이끌어야 하는 아시타카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자신의 고유한 캐릭터성을 버리려고 고민한나머지
캐릭터의 밸런스를 굉장히 못맞춘것 같다는 것이다.

이 밸런스가 깨짐으로 스토리 또한, 굉장히 뭔가 있고 멋있어 보이지만 결말은
뭔가 얼빠진것 같은 느낌도 들고 말이다.

넘어가서 이 작품은 수작업만을 고집하던 미야자키 감독이 컴퓨터 그래픽을 쓴 작품이다.
수많은 산돼지 떼들의 모습이 그 예다.

그 이후로 감독은 컴퓨터 그래픽을 많이 애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세기말이 만연하던 99년도 전쯔음에는 이 애니메이션이 큰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전설로 남았지만. 작품성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원령공주 -200713034 양은영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원령공주는 지브리에서 제작비 200억을 들여 만든 지브리 애니 최초의 cg도입 애니메이션으로 베니스영화제, 앙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장편 애니메이션 부분 수상, 일본 여러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미야자키 감독은 여러 스텝들과 자연의 이미지를 더 확실히 하게 담기 위해 일본에서 자연의 예전 모습이 남은 곳을 찾아 사진을 찍고 소리를 녹음했다고 하는데 그런 노력이 담겨져 한층 더 우리들이 시각적, 청각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던 것 같았고 또한 원령 공주에서 나오는 배경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데 인물들이 입고 나오는 옷들과 제철소, 화승총 등과 일본 고대신들이 등장하여 일본의 특색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 되었다.

주인공 원령공주는 들개의 신의 딸로서 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적인 인간들에겐 원한을 가지고 재앙을 내린다는 뜻의 원령공주라고 불리는 소녀이다. 그녀는 모노노케 히메라는 작품 자체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과 가지고 있는 배경은 그녀 자체에게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이면서 자연을 대변하는 인물로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며 인간을 배척하는 인물이지만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는 큰 상처를 가지고 있어 이해가 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를 들개의 신 모로에게 겁이나 재물로 바친 인간들은 자연이 자신의 소유인양 당연하게 자연을 훼손하며 산 아래 제철소을 만들어 생활을 꾸려 나간다.

이 제철소의 주인은 에보시라는 여자인데 일본의 기계가 낯선 시절, 아주 과거의 시대에 주인이 여자라는 설정은 꽤나 파격적인 설정으로 원령 공주와 대조적인 인물이다. 여장군의 이미지로 사회에서 소외받은 병 걸린 자, 돈에 팔린 여자들, 소몰이꾼 남자들을 데려와 일을 시켜 그 소외받는 계층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는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들의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기며 파괴하는 자연의 적인 여자로 선악이 항상 공존하는 인간을 대표적으로 잘 표현한 인물인거 같다.

그리고 미야자키 감독은 이런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이야기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을 넣는데 그게 아시타카라는 소년이다. 아시타카는 야마토 정권에 패하고 북쪽에서 숨어사는 에미시의 후계자로 악령이 된 신에게 저주를 받고 저주의 원인을 찾아 산과 에미시가 있는 장소까지 오게 되는 인물로 정의로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제철소와 숲속을 오가면서 그들의 상황과 저주의 원인을 알게 되는데 절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소년답지 않는 넓은 포옹력으로 모든 상황에 참여하여 긍정적으로 일을 해결해 가려하는데 그의 의지가 아마도 감독의 말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편이 될 수밖에 없는 아시타카가 자연의 편인 산을 사랑하게 되는 것(권력에 패해 숨어사는 자신의 입장에서 열악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반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도 그 둘의 중립을 이루게 하기위한 하나의 장치로 설정하기 위한 것 같았고 시시가미의 목이 인간의 욕심으로 떨어져 재앙이 닥쳐 올 때도 그들 양 쪽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와주어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강구해내는 미래를 이야기하여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후반부 장면에서 산은 아시타카에게 인간은 싫지만 아시타카는 좋다 라고 말하고 아시타카는 계속 산을 만나러 가겠다고 한다. 이런 대사와 장면의 마무리로 미야자키 감독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과 공존에 대해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하고 애매하지만 긍정적인 결말을 냈는데 그것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가리지 않고 현실성있게 보여줌으로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제시하며 생각해 보게하는 계기를 주는 것 같았다.

또한 시시가미가 자신의 목을 찾으면서 자신의 모든 힘을 버려 자연을 다시 회복하는데 이러한 장면을 보여줌으로 자연은 모든 것을 포옹할 수 있으며 인간에게 항상 열려있었다는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아 그에 대한 감독이 우리에게 보내는 자연과 인간과의 문제의 답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원령공주_..200613144 박 민아

인간의 과도한 문명 발달에 대해 신랄하게 비꼬며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애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늘 그러하다.
환경 친화적이고 자연주의적이며 인류발달을 지나치게 혐오한다.
물론 지브리 특유의 멋들어진 감각의 수채화와 부드러운 느낌이 그러한 과도한 성향을 덮어주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어쩜 저렇게 철의 느낌을 해괴하고 지저분하게 묘사할 수가 있는지 신기하다.
부분 부분의 묘사들도 환상적인 느낌과 동시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신이라는 존재도 완벽하지 못하지만, 역시나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격의 대상으로 비춰진다.
어른의 판타지랄까.
피가 난무하는 꾀나 잔인한 장면들이 다수 등장 하는지라,
중학교 때 처음보고 꾀나 충격이었던 기억이 난다.
여자 주인공 얼굴이랑 남자 주인공 얼굴이 똑같이 생긴 것도 혼란을 준다.
왜 이렇게 여자를 못 그리는 건지 모르겠다.
뭐, 그래도 암울하게만 이어가질 않고 재치 있고 가볍지만은 않게 적당히 심각하게 풀어나가다가 마지막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나름 교훈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음악. 환상적이다.
이 정도라면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 보더라도
10점 만점에 8,9점은 거뜬히 딸 수 있지 않을까.

원령공주 100자평_200713019 김다희

웅장한 자연의 모습과 지금은 사라져버린 고대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을 알리는 원령공주는제목에서 느껴지듯이 많은 원한과 슬픔을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원령공주는 삶 자체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여기선 크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자연과 자연의 대립적 구도로 끊임없는 전쟁을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히 자신들의 권력과 힘을 위한 욕망으로 싸우는 자,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 원한에 사묻혀 싸우는 자 등 억지스러운 인간의 내면이나 살기위한 욕망을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표현하고 있었다.

우리는 주인공인 아시타카의 눈을 통해 이 모든 싸움을 지켜본다.

직접적으로 전쟁에 중심에서 그는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전쟁을 보고 있었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쟁의 고통을 짊어지며 그 괴로움을 전하려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전쟁을 지켜보며 우리는 그 잔혹함을 느끼고 반대편에 있는 자들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대립의 중심에 있던 아시타카의 눈에선 선과악을 따질 수 없었다. 자연도 인간도 단순히 살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함께 공생하기엔 사는 방식이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단지 그 차이에 그들은 싸울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살아갈 방법은 없는가?"

아시타카가 에보시에게 한 질문이자 감독이 우리에게 한 질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끝나고 점점 사라져가는 자연의 형태들을 생각해보았다. 위협적으로 보였던 에보시의 제철공장이 이미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자연들이 오염되고 사라졌다. 그리고 우린 계속 새로운 재앙을 받고 있었다. 질병, 재해 등 이 모든 것이 애니메이션에서 분노에 빠져 생명을 빼앗아 가던 사슴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
마지막에 고대와 자연을 대표하던 사슴신이 쓰러지고 모든 것을 다시 태초의 자연상태로 돌린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태고의 신들도 전쟁으로 인해 그 대부분이 사라져 버린다. 멀지 않은 미래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자연만이 남은 종말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감독은 아시타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대립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고대부족이였던 에미시 일족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을 바탕으로 살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들은 고대에 자연과 함께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최후의 후예로 표현되던 아시타카를 보며 우리는 선조의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을 떠올려본다. 그가 마을을 떠나 문명화된 곳을 여행하게 된 것은 문명인들이 잊어버린 자연과의 공생을 떠올리게 하기 위함이아니였을까.

자연 그 자체에 녹아든 사슴신을 느껴본다. 그리고 '숲의 비명소리가 느껴지지 않느냐'던 모로의 말을 다시 가슴에 새기며,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살았던 조상들의 그 모습과 지혜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원령공주 100자평] 200415400 이홍규


<원령공주> 감상 100자평


200415400 이홍규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통해 ‘반전’과 ‘환경 파괴’에 대한 메시지를 작품 속에 담아 내며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수없이 노력해왔다.
이 두 가지 메시지는 전 인류적 측면해서 생각해봤을 때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이고 또 그 문제점들이 공론화 됐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변화의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수 많은 이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반전과 환경보호를 외치곤 하지만 지나가는 행인들의 귀에 그것은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이처럼 남에게 이해시키고 공감을 불러일으켜 심경의 변화를 만들어내기가 지극히도 어려운 일들을 하야오는 자신만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꾸준하면서도 강렬하게 전달 해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메시지 전달법이 별책부록처럼 그 자체를 억지로 끼워 넣어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식은 아니다, 그는 신화와 전설, 민담등을 기반으로 한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첨가하여 애니메이션을 만들되, 그 애니메이션의 기저에 메시지를 교묘하면서도 산발적으로 끼워 넣곤 한다. 그 때문에 굳이 누가 ‘환경을 좀 지켜주세요’, ‘제발 전쟁 따윈 이제 그만 두자구요’ 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 2시간 가량을 감상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고판단의 기준까지 다르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원령공주는 하야오의 교묘하고도 철두철미한 전략이 드러난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신화적인 구조의 하나로 기본 골격이 이루어져있는 이 작품은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힘을 과용했을 때 환경에 의해 그 힘이 역순환 하게 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나무를 베는 인간들과 그 숲에 살며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숲의 신간의 대립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마치 자연이 제 것 인듯 무차별적으로 파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돌이켜보며 이대로 파괴가 계속된다면 숲의 신들처럼 자연도 현실세계의 우리에게 어떠한 재앙을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시타카에게 내려진 저주 또한 그 역행의 일환으로 생각 해 볼 수 있다.
하야오의 고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마을 사람들도 결과적으로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처지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벌목을 하고 있다는것도 함께 보여줌으로써 현재 인간과 자연사이의 절대적인 관계구도를 규정하기 보다는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타협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를 지향하려는 의지가 내포 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애니메이션 내에서의 결말은 좀 시원스럽지 못하다. 인간들의 분쟁의 중재자였던 아시타카와 자연들의 분쟁의 중재자였던 산이 결말에 다다라서는 서로의 영역에서 자리를 지키기로 하고 헤어지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종국에 와서도 자연과 인간의 완벽한 공존과 화합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와 더불어 아직도 그 분쟁의 씨앗은 종식되지 않았고 우리가 그 사실을 주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반복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전세계적으로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자신만의 스타일로 기상천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반으로 전 인류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항상 던져주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리 재미있고 화려한 애니메이션일지라도 그 작품을 보고나서 남는 메시지가 고작 ‘강자는 승리한다’ 정도라면 너무 허무하고 어이없지 않겠는가?
물론 재미와 메시지라는 두가지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일이고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하야오가 세계적인 감독으로서 인정받고 세계인들의 이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원령공주 100자평

원령공주

200713033 심영보


나는 원령공주를 맨 처음 보았을 때 굉장히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볼 땐 못 만들어서 재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이유를 알 것 같다. 확실히 말해서 이 작품은 결론이란 게 없다. 끝까지 다 보고 나서도 ‘자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됐다는 소리지?’ 라는 번뇌에 휩싸이게 된다. 용두사미형 실수는 실패한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원령공주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왜? 감독 혼자만 인정하는 망한 영화의 ‘열린 결말’ 과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은 원령공주의 ‘열린 결말’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원령공주에서 없는 것은 결론뿐만이 아니다. 선악구도 자체가 희미하다.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들과 대립하는 몬스터는 초반부터 신성시되던 절대신이다. 이외 다른 인물들도 선악의 양면성을 가지고 그 경계를 넘나든다. 그나마 가장 선에 가까운 존재가 아시타카와 산이겠지만,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못하고 서로를 떠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사람도 자신의 세계를 넘어가면서까지 상대를 포용하는 절대선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못한다.)
선악구도가 없는 상태에서의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감독이 이용하는 것은 ‘상황’ 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명확히 존재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에보시는, 그들을 굶게 하느니 차라리 신들의 세계를 공격한다. 그녀의 선택은 환경의 파괴를 가져오지만, 또한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 신장을 가져온다. 그녀의 선택은 개인의 욕망에 휩쓸리는 경우 보다는 상황상, 어쩔 수 없이 강요되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이것이 포인트다. 선악구도가 명확한 헐리우드식 애니메이션은 악당을 무찌르면 세상이 구원된다. 당연히, 우리 편인 영웅은 결점이 거의 없는 인간이다. 있어봤자 중년에다 뱃살이 좀 늘어진 정도?(인크레더블) 하지만 원령공주의 인물들은 무분별한 선의나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소망은 함부로 폄하할 수 없는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를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도 많다. 내용의 전개를 위해서 영생을 원하는 탐욕스러운 무리를 집어넣긴 했지만, 그게 주된 갈등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하다. 절대악도 없고 악당도 없으니, 한두 사람 무찌른다고 상황이 회복되지도 않는다. 그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쪽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쪽만이 나뉠 뿐이다.

결국 감독은 영웅도 악당도 없는 세상이 어떻게 멸망을 향해 굴러가는지를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휩쓸리는 개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다 보니 미야자키의 필름은 묘하게 전쟁 영화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많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영웅이 없는 사회.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담이지만, 미야자키의 캐릭터들은 상당히 순수하고 매력적인 인간으로 표현되는 편이다. 어느 필름이든 항상 등장하는 씩씩한 소녀와 속 깊은 소년의 캐릭터는, 단지 매력만을 위해서만 설정된 것은 아니다. 저런 선악구별 없는 내용을 끌어나가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적인 매력이 필요하다.
... 뭐... 사실 감독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원령공주의 부제,'살아라!'_'200713050_한수연


사슴신의 죽음을 지켜보던 아시타카는 말한다.
“ 나에게 ‘살아라.’ 하고 말하셨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있는 말 아니었을까.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갈등은 타협하지 않는
의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고 멧돼지 신으로 하여금
다른 존재를 용서하지 못하고 해치려 드는 재앙신이 되게
만들었으며. 모로 일족과 에보시를 증오관계에 놓아두었다.
자연의 신들은 인간을 거부했다.
에보시의 경우 누구보다 약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이끌 줄 아는 개혁자이자 훌륭한 리더였지만,
마찬가지로 자연과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주변에는 온갖 욕망의 무리들이 들끓는다.
그 속에서도 각자의 인물에게는 자신만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그에 따른 주체성과 존엄함을 지키고자 하는
강력하고도 필사적인 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러나 피와 복수의 오랜 싸움 끝에서 결국 남은 것은
또 다른 ‘삶’이었고, 또 ‘살아가라’는 생명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 아닌, 존재
그 자체의 주체성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고집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현실에 스스로를 묻어가게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니다... ‘살아라’는 마지막 말은 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의지를 향한
여정을 해나가고 살아간다는 것... 진정 살아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바로 그 의지... 그것은 결국 상처와 허물 끝에 공존으로 이어지고,
그럼으로서 모든 생명을 용서하고, 따뜻하게 포옹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결국에는 서로를 끌어안는 순수함에서 우러나오는 공존..
그것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원령공주 100자평 - 200713047 천혜림


모든 국가는 전설을 바탕으로 설립되고, 전설은 이미 세력을 잡은 권력자들의 구미에 맞게 아주 희미한 내용을 바탕으로 후손들이 만들어낸다. 미야자키의 어둠에 관한,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어조의 이 영화는 유럽의 꿈을 거슬러 올라가 일본의 희미하면서 상상으로 만들어진 과거에 이르기까지를 그 배경으로 삼는다.


그는 ‘일본의 고대 전설’, ‘민담’이라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아이디어 창고로 언급하며 그 가능성을 강조해 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이 <원령공주>의 초석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 감독은 그가 초창기 시절부터 품어왔던 주제를 야기 시켜 하나의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시나리오의 윤곽을 잡아왔다. 자연의 힘, 거대한 압제자와 맞서 싸우는 약자들의 투쟁,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사랑의 가치가 그것이다.


그러나 <원령공주>에서 그는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추구했다. 자연과 문명의 공존, 향수, 조화의 메시지를 떠나 좀 더 현실사회의 상처와 고통을 대변할 수 있는 작품으로써 관객에게 다가서길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스스로에게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원령공주>라는 영화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본인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저주를 받게 된 21세기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그는 아시타카가 지닌 저주의 증거인 화상 자국을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생명을 위협하고 몸으로 느끼는 고통으로 바라본다. 이 상처를 치료해가는 과정과 갈등은 현대인들에게 과거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보다 직설적인 충고를 던져준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은 작품 속에 깊숙이 녹아 있다. 독선을 향한 질타, 어느 한 쪽이 주장하는 옳고 그름과 그 기준에 맞춰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행위. 이것은 <원령공주>의 가장 핵심적인 갈등과 일련의 모순 덩어리를 엮어가고 있으며, 그 주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위험해지는 세상에서 부족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서로 다른 두 종족간의 투쟁과 긴장관계로써 나타난다.


현대의 삶은 여러 가지 문제가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고통, 상실, 분노, 변화, 복잡함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야자키는 인간과 신들의 물리적인 싸움을 통해 드러난 인간과 초자연적인 존재 사이의 관계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원령공주>를 통해 21세기가 온전히 안고 있는 하나의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용조 진행중..

1.
http://blog.naver.com/sunyeab 살리자 님의 블로그 발췌
오타쿠가 한국 신세대 입맛에 끼친 영향 생각 해보죠
전 회까지 일본의 오타쿠 상황에 대해 장시간에 걸쳐서 다뤄봤다. 이제 한국 문화 산업과 오타쿠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어보면서 긴 연재를 정리할까 한다.
[사회를 보면 문화가 보인다(11)] 한국에서의 오타쿠 문화 전개 양상
먼저 간단한 질문. 왜 지금까지 바다 건너 외국의, 매우 거칠게 정리하자면 단순히 애니메이션과 만화, 게임을 너무 좋아하는 마니아의 성립과 현재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을까?
그 답은 현재 한국의 대다수 애니메이션과 만화, 게임이 오타쿠 계층의 행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계속된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한국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의 전개양상이 일본보다 오타쿠적인 성향을 더욱 강하게 띄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화제를 모은 드라마 `전차남`. 그런데 대체 왜 바다 건너 나라의 이런 별난 소제가 한국에서도 적지않은 공감을 모은 걸까?
일본 오타쿠 상품, 한국에서의 일본 애니메이션·만화·게임 콘텐츠의 인상을 결정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있는 `카페알파`. 애프터눈에 연재된 이 만화는 1990년대 이후의 일본 SF를 논할때 가장 중요한 만화이기도 하지만 대단한 마니아 만화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본의 월간 만화잡지 <애프터 눈>은 한국의 만화 팬이나 만화가 지망생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온 잡지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는 이 잡지가 일본에서 대단히 인기가 많은 잡지로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일본에서 이 잡지는 전혀 대중적이지 않다. 일본 전체 잡지 순위에서 80위 정도를 차지할 뿐이다. 이 잡지는 잡지가 출판되는 고단샤 사내에서도 ‘괴짜 잡지’로 인식돼왔고, 내부에 연재되는 만화들도 단행본의 판매 순위는 높지만 일반인들이 부담 없이 접하기에는 어려운 만화들로 인식되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의 일본 만화 소비자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소년 에이스>나 양경일-윤인완 콤비의 <신 암행어사>가 연재중인 <선데이 제넥스> 등의 잡지도 보통 발행부수가 4~5만 정도를 기록하는 비주류 잡지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유명도는 일본 안에서 부동의 인기를 고수중인 <소년 점프>(현재 300만 부 발매)나 <소년 매거진>(현재 180만 부 발매)와 같은 주류 잡지들에 비해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절대적인 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크리에이터에 영향을 미친 애니메이션 <아키라>의 경우도 일본 안에서는 대중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 오토모 카츠히로가 만든 이 작품은 대단하지만 일본 대중들이 애니메이션의 대명사로 지칭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몇십 년 간이나 같은 시리즈가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도라에몽>과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공중파 텔레비전으로 저녁 시간대에 연속적으로 방영되거나 <도라에몽>, <크레용 신짱-짱구는 못말려>의 새 극장용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방학 시즌에는 반드시 극장에 걸리는 것과
▲정작 일본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장수 애니메이션은 이 ‘사자에상’이다
비교해 ‘아키라’는 극히 일부 팬에게만 기억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영화잡지들이나 영화 평론가, 애니메이션 팬들에 의해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퍼펙트 블루>, <공각기동대> 등의 애니메이션도 이 경우와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이상할 정도로 인기를 끄는 장르로 일본의 판타지 만화 장르가 있다. 이런 판타지 만화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 중 <베르세르크>가 있다. 이 작품이 대작임에는 분명하지만 <강철의 연금술사>, <블리치> 등의 타이틀에 비하면 그 인지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요약하면 한국에서 너무나 유명한 만화 잡지나 상품들은 일본에서는 서브 컬처란 것이다. 즉, 주변부 혹은 비주류 만화들로 숫자적인 측면에서는 일본 만화의 메인 스트림을 구성하고 있다고는 보기힘든 작품이나 매체들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이런 매체를 제작중인 이들 작가들이나 출판사의 편집진과 직접 만나보면 확연히 느낄수 있다. “한국에서는 매우 인기다”라는 말을 전하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조연, 비주류들이 왜 한국에서는 인기를 끄는 것일까? 이 현상을 사회학의 세대론을 통해서 보면, 지금 한국의 주력 창작자들이나 문화산업 종사자들의 청소년기 경험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1980년대의 사회변화가 한국 신세대의 특징을 결정
먼저 박재홍 교수 등이 정리한 한국의 세대론을 간략하게 소개하자. 한국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세대 구분은 크게 4가지 그룹으로, 식민지·전쟁 경험세대, 산업화 세대·민주화 운동 세대, 386세대, 신세대 등이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대는 4번째의 신세대로, 1960년대 말기부터1970년대 초중반에 주로 출생한 세대를 가리킨다. 즉, 2006년 현재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 콘텐츠산업의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만하임 등의 학자가 주창한 세대론을 참조하자면 어느 세대가 사춘기 시절에 겪는 경험들의 축적이 어떤 가치관을 결정하고 이 가치관이 이후의 경험들의 방향 짓는다고 이야기한다. 이들 신세대는 사춘기 시절인 1980년대 중반에 당시 해외 여행 붐과 무역 자유화 등의 개방정책 바람을 타고 유입된 해외정보를 집중적으로 받아들인 세대다. 물론, 가장 많은 정보가 전해진 것은 인접국가이자 당시 세계최고의 경제호황을 구가하고 있던 일본이었다.
반면에 이전 세대인 386세대는 유신정권의 영향이 아주 깊은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1970년대에 유소년기를 보냈는데, 이런 억압적인 경험이 청년기인 1980년대에는 군사정권에 대해 학생운동을 벌이게 되는 정치적인 태도를 낳기도 했다. 이념적인 문제는 이들에게 중요한 과제였던 것. 반면 이후 신세대는 1989년의 소련해체와 베를린 장벽 붕괴 등을 보면서 이념적인 과제는 조금 뒤로 밀려버리는 경향을 보이게 되고, 이러한 집단-사회적인 과제보다는 개인적인 문제에 좀더 몰두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에 1980년대부터 시작되는 야간 통금해제, 프로 스포츠의 리그 개막, 컬러 텔레비전 방송, 비디오 보급 등을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오락-소비문화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의 1980년대 후반은 이들 신세대가 일정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면서 소비 시장의 전면에 등장하고 이로 인하여 문화 시장의 판도가 어느 정도 변해가던 시기였다. 이른바 대량소비사회로 변해가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던 시기다. 이런 신세대의 위력이 현실로 나타난 사례가 저 유명한 서태지 붐이었다.
일본 문화 개방과 오타쿠 문화의 전파
그런데 신세대가 기성의 한국 것이 아닌 뭔가 새로운 흥미거리로 가득찬 외부로 지목한 1980년대 일본은 어떠했을까? 당시 일본에는 오타쿠 상품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주요한 작품들이 한창 발표되던 시기였다. 이전의 연재에서도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진 오타쿠 세력의 확장과 소비문화 확산이 절정을 향해 치달을 시기였다.
한국의 신세대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깊은 영향을 받으시면서 성장한 세대다. 이들은 1981년에 시작되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으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을 집중적으로 보면서 자랐다. 이러한 신세대들에게 오타쿠 상품은 상당히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을 접해온 이들은 사춘기를 기점으로 더욱 고도화된 작품을 보고 싶어했고 때마침 일본에서 만들어지던 OVA용 애니메이션이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이들 입맛에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OVA나 극장용 애니메이션 명실상부한 오타쿠 상품이었다.
당시 일본의 주류를 형성하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들이 이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경제적인 이유다. 당시 한국에 이들 상품이 전해지던 루트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보따리 장사 등을 통한 비공식인 루트였고, 주로 비디오를 통한 불법 복사등의 방법을 통하여 유통이 됐다. 그러다보니 이들 불법 복사 상품은 결코 싸지를 않았고, 그러다보니 수십편이나 되는 대중적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은 선호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니 일본에서는 마니아 상품이었던 일부 애니메이션들이 한국에서는 마치 주류 상품인 것처럼 비쳤던 것이다.
2004년 필자는 한국에서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 만화 잡지 시장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신세대 만화 작가에 대한 인터뷰 조사를 실시했는데 대부분 작가들이 청소년기에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이들이 영향을 받은 만화들은 물론 <아키라>와 같은 일본에서 결코 주류라고 할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한국 안에서 콘텐츠 창작자들이 이런 성향을 가지니 더더욱 그 영향을 받고 자라나는 소비자, 잠재적인 콘텐츠 창작자들도 비슷한 성향의 작품을 선호하게되는 것이다.
한국은 이러한 연유로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이상의 마니악한 만화·애니메이션 문화를 보유하게 된 것이며, 일본에서 전개되는 오타쿠 문화 양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2.
지난 2008년 6월 17일, 1989년 일본 사회에 충격을 안겨준 엽기 여아연쇄유괴살인범 미야자키 츠토무의 사형이 도쿄 구치소에서 집행되었다. 1988년 8월 ~ 1989년 6월 사이에 도쿄와 시아타마현에서 4~7세의 여자 아이 4명을 외설 목적으로 유괴하고 살해, 살해 후 외설 행위를 카메라로 촬영하는 등 엽기적인 행동을 햇던 그는 1989년 7월 23일 체포된다. 1990년 시작된 재판은 미야자키 츠토무측이 다중인격장애를 주장하면서 장기화 되었지만, 16년 후인 2006년 1월 최고재판소에 의해 사형이 확정된다. 당시 언론에서는 미야자키 츠토무의 자택에서 약 6000개의 비디오 테잎과 만화책을 발견했다고 했고, 다량의 아동 외설 비디오와 만화책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사회에서는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자리잡았고, 일부에서 오타쿠는 ‘잠재적 범죄자’ 란 식의 극단적인 평가까지 나온다. 그러던 중 2005년에 당시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을 취재했던 요미우리신문 기자의 고백이 신문 편집부 블로그에 올라오게 된다. 다음은 원문의 일부 번역.
(역자주 : 기자가 쓴 원문을 인용한 글의 번역)
전략...
이해 불능이라고 생각한 사건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경험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헤이세이 원년(1989년)의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입니다.
여아 4명의 연속 유괴 살인.
오움(진리교 사건) 이전의 전후 최대 사건인지도 모릅니다.
비디오 테잎으로 채워진 미야자키 츠토무 방의 영상을 기억하는 분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건 이후에 그 방에 처음으로 들어간 사람은 저입니다.
미야자키 츠토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이츠카이치쵸에 있는 그의 자택으로 급히 갔습니다.
이런, 아직 경찰관도 오지 않아서 3~4명의 타사의 기자가 그의 양친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누군가가 그의 방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의 부친이 허락해줬습니다.
안채에서 그의 방까지는 폭 30cm정도의 판이 통로 대신 건너게 되어 있었습니다.
폭이 좁았기 때문에 한 명씩 건너가게 되어서 5,6명의 기자가 가위바위보.
그것이 제가 첫 번째가 된 이유입니다.
방에 한 걸음 들어갔을 때의 일은 잊을 수 없습니다.
창문이 없어서 어두컴컴하고, 사방의 벽면이 모두 비디오 테잎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텔레비전과 비디오 데크가 3~4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은 본 적이 없습니다.
확실하게 이해불능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방의 영상을 기억하고 있는 분이라면, 그 비디오는 모두 ‘어덜트’나 ‘도촬’이나‘로리타’등 그런 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다릅니다.
매우 당황해하며 비디오 타이틀을 찍었습니다만,
대부분은 ‘남자 초바보 코시엔 (야구관련)’이나 ‘도카벤 (야구관련)’ 등의 지극히 보통의 애니메이션 뿐 이었습니다.
그 중에 불쾌한 영상이 들어간 비디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만, 적어도 그것은 극히 일부였습니다.
어째서 그런 이미지(야동 외설 비디오 등의)가 보도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유가 있습니다.
방의 구석에는 수십권의 잡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어떤 잡지인지도 물론 확인했습니다.
대부분은 ‘GORO'.'스콜라 (그라비아 위주의 남성향 잡지)입니다.
20대의 남성으로서는 지극히 보통이지요.
그 중에 ‘젊은 부인의 생속옷’ 이라는 만화가 1권 있었습니다.
어떤 민간방송의 촬영팀이 그것을 빼내어 제일 위에 올려놓고 촬영했습니다.
그것으로, 그 잡지가 쌓여있는 전부, 더해서 비디오도 그런 류라고 하는, 잘못된 이미지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뭐, 저지른 범죄로 본다면 그 정도는 오해받아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래도 역시 사실과는 달랐습니다.
고교생 체포의 석간을 보고, 그런 일이 생각났습니다.
이런 매스컴이 만들어낸 ‘자의적인 영상’으로 인해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오타쿠’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이어졌고, 그 중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다음의 내용.
미야자키 츠토무의 유아연쇄살인사건이 일본을 뒤흔들었던 1989년, 8월의 코미케(코믹마켓, 일본의 유명한 동인만화축제)로 TV중계를 하던 TBS 와이드쇼의 여성 리포터가 ‘여기에 10만명의 미야자키 츠토무가 있습니다.’ 라는 발언을 해서 논한을 일으켰다.
매스컴의 ‘자의적인 영상’과 그것을 근거로 한 보도들로 인해서 ‘오타쿠’는 ‘사회 부적격자’나 ‘잠재적 범죄자’등의 부정적인 시각이 일본 사회에 자리잡았고, ‘오타쿠’란 단어가 금기시 되기까지 했다.
문제는 ‘자의적인 영상’을 만드는 것을 묵인한 다른 기자들과, 고백을 한 기자조차도 그 매스컴의 일부로서 가책을 느끼지 않는 태도 (원문은 삭제됨)이다.
3.
日, ‘오타쿠’ 연쇄살인범 사형집행
2008년 06월 18일(수) 오전 02:01 가 가 이메일 프린트
[서울신문]|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정부가 17일 또다시 흉악범 3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상이 취임한 이래 사형 집행은 지난해 12월, 지난 2월과 4월에 이어 4번째다. 모두 13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집행된 사형수 3명 가운데 지난 1988∼89년 세상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여아 연쇄 유괴살인범 미야자키 쓰토무(45)도 포함돼 있다당시 도쿄와 사이타마현에서 4∼7세의 여자 어린이 4명이 유괴돼 변을 당했다. 미야자키는 살해한 아이의 유골 일부를 상자에 넣어 피해 가족에게 보내고 언론과 희생자 가족에게 잇따라 편지를 보내는 엽기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본 언론은 그가 살해한 시체의 손을 절단해 일부를 먹고 피를 마셨다고 보도했으며, 그의 이 같은 범죄 행각은 폭력·외설물이 판치는 일본 사회에 큰 경종을 울렸다.
미야자키가 저지른 잔혹한 사건은 당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와 함께 ‘오타쿠(御宅)’의 존재를 일반화시키는 계기도 됐다. 또 범죄 수사에서 ‘정신감정’의 필요성도 부각시켰다. 세상과 오랫동안 거의 격리된 은둔형 외톨이들의 범죄가 널리 문제화된 계기이기도 했다.‘오타쿠’는 특정한 분야나 사물에만 관심을 갖고 관련된 물건이나 정보를 모으는 사람을 통칭한다. 범행장소로 사용된 미야자키의 방에는 6000여개가 넘는 공포 영화 등의 비디오 테이프와 함께 만화, 잡지 등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법무상은 “법이 지배하는 국가를 실현해 가기 위해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면서 “신중하게 검토한 결과”라고 밝혔다.
h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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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hoo. 세계 뉴스 발췌
4.
만약 오타쿠가 없었으면 일본의 버블 경제가 아직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버블 경제는 80년대 일본 경제의 최대 호황기 때 일본 내 기업, 정부 및 금융권의 자금이 기술투자보다는 부동산 또는 주식에 몰리게 되면서 실제적인 가치보다 높이 거래되는 버블(거품)이 끼게 되어서 엔화 가치의 절상으로 인한 부동산과 주식의 가치 하락으로 이어진 문제였다.
버블 경제 와해 원인 중의 하나가 경제 오타쿠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으로 일본의 국가산업 중의 하나인 애니메이션 사업에 이들이 막강한 자금력을 동원해서 내수 경제를 안정시켜서 버블 경제를 와해시켰다.
그러나 결국 오타쿠는 1989년 여자아이 4명을 유괴하고 체 사진을 찍은 다음에 해한 로리콘 미야자키 츠토무의 토막시신 배달사건 이후로 본격적으로 나쁜 뜻으로 정형화 되어 버렸다.
5.
한 가지에 심취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는 사람이나 사회적 현상을 일본에서는 '오타쿠'라고 부
른다. 원래 이 말은 한자로 당식이라는 의미의 '댁'에서 온 말인데 집안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세계에 탐
닉하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짙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영어의 '마니아'와 마찬가지로 특정 분야의 애호가
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오타쿠층은 일본 소비문화의 패턴으로 정착한지 오래다. 70년대 후반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은하철도
999’를 비롯, ‘우주전함 야마토’, ‘루팡 3세’ 등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드라마성 높은 애니메이션이 히트하
면서 오타쿠 붐을 몰고 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80년대에는 버블 경기에 편승해 텔레비전 세트 및 고가 오디오 세트 구매 붐이 오타쿠의 확산을 가져왔
으나 80년대 말 도쿄와 사이다마에서 발생한 여아 연속 유괴사건으로 오타쿠에 대한 사회적 조소와 배격
이 일었던 때도 있었다. 이 사건 용의자가 ‘애니메이션 오타쿠’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타쿠는 변태적
인 계층으로 매도됐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 TV게임 시장이 성장하면서 오타쿠 계층이 사회적 마이너리티에서 점
차 탈피, 소비트렌드를 견인하는 세력으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2000년대 이후 오타쿠 관련 산업은 사회
현상으로서나 인간 유형으로서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오타쿠 시장, 연 2조9000억원 추산
일본의 백화점이나 쇼핑센터를 가보면 캐릭터 상품 코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히트한
캐릭터를 소재로 완구, 문구, 선물용품, 프리미엄 등 다종 다양한 제품으로 시선을 끌고 있는데 이들 제
품의 주요 타깃이 ‘애니메이션 오타쿠’ 층임은 물론이다.
이들 오타쿠층은 얼마나 되고 이들이 구매하는 제품은 연간 어느 정도일까? 일본의 유명 싱크탱크 노무
라 연구소가 지난 해 말 이에 대한 조사에 나선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지난 해 말 현재 일본의 오타쿠 계
층은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등 주요 5개 분야에만 285만명이며, 연간 구매액수는 2900억엔(우리 돈 2조
9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콘텐츠 관련 4개 분야 -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아이돌 -
가 2530억엔 정도로 전체 오타쿠 시장의 약 87%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오타쿠들은 틈새로서의 ‘니치(niche)’ 시장이 아니라 전체 소비패턴에도 큰 영향력을 줄 만큼 성숙
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동 연구소측의 분석결과다. 특히 최근에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오타
쿠들의 상호 교류와 지식 공유가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차세대 기술혁신이나 신 소비풍토의 조성에도
이들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신제품 출시를 앞둔 기업들은 테스트마케팅 대상으로서 오타쿠층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거나
이들을 우선 공략하는 데 혈안이다. DVD 오타쿠들을 공략하기 위해 DVD와 함께 ‘오마케(끼워주는 상
품)’로 캐릭터 인형을 덤으로 주는 것이 그 한 예다. 이 때문에 ‘오마케’ 상품 수집에 혈안이 된 오마케 오
타쿠들도 나오고 있다는 얘기다.
이같이 최근에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오타쿠에는 어떤 종류가 있고 그 특징은 어떠한 것인지 노무라 연
구소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분야별 오타쿠들의 특징
우선 애니메이션 오타쿠는 TV 애니메이션, OVA(Original Video Animation), 애니메이션 영화 시청을 일
과로 하는 오타쿠로서 15~40대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TV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주 10편 이상
녹화하는 사람이 많고, PC 및 HDD 레코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IT 리터러시가 상대적으로 높은 것
이 특징이다. 전체 애니메이션 DVD 시장의 약 13%를 이들 오타쿠가 주도하고 있다.
둘째, 어덜트(Adult) 오타쿠는 특정 아티스트나 탤런트에 대해 강한 동경심을 보이는 계층으로서 연예인
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이들의 관심사다. 우리나라식의 ‘오빠부대’라고 할 수 있는 10~20대 젊은이들은 연
예인들을 따라다니며 현장에서 시간을 공유하는 데 몰두하기 때문에 ‘현장계’로 불린다. 이와는 반대로
20~30대는 현장에 가는 대신 프로모션 비디오나 DVD 등을 앞장서서 수집하는데 온갖 노력을 쏟기 때문
에 ‘수집계’로 불린다.
셋째, 만화 오타쿠는 코믹만화 동호회잡지 전시판매회에 참가하거나 동호회 잡지를 집필하는 계층이며
10~40대까지 폭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 분야는 장르별로 소년계, 소녀계, 어덜트계 등으로 세분화
되어 있는데 코믹만화 상의 특정 캐릭터를 중심으로 흉내내거나 동호회에 기고를 하는 등이 주 활동형태
다. 애니메이션 오타쿠와 중복이 많으며 동호회지에서 전개되는 패러디를 통해 만화 붐을 확산시킴으로
써 만화가의 성공 여부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넷째, 게임 오타쿠는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게임에 소비하고 있는 중독층으로 13~24세의 젊은 층과 30
대에 많이 분포돼 있다. 가정용 게임 시장이 가장 크지만 빅 타이틀의 과점화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새
로운 장르가 탄생하지 않아 최근 침체기다. 최근 핵심 사용자들의 고령화가 진전되고 있으며, 네트게임
을 포함한 PC게임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상황이다.
오타쿠 문화산업 신진대사 기능에 주목
이상 대표적인 4개 오타쿠 외에도 자동차, 여행, 추리소설, 심령과학에서부터 개라지 키트, ‘코스프레’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오타쿠 문화는 최근 범위와 깊이 양면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불고
있는 우리 드라마 및 영화 붐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오타쿠 현상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는 오타쿠라고 하면 외부와는 담을 쌓고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함몰하는 뭔가 어두운 이미지가 있
었으나 지금은 케이블 TV나 디지털 방송 등 매스미디어나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서로 경험을 교류하고
지식을 공유하는 열린 오타쿠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외부와 연계하는 새로운 형태의 오타쿠들이 활동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서브컬
처(subculture)에 머물지 않고 문화산업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순기능을 담당하
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생산적 오타쿠’는 새로운 상품이나 캐릭터의 탄생을 촉진하는 산파 역할까지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타쿠 현상을 남성과 여성을 넘나들며 소비의 크로스 오버를 진작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의 대상이다.
우리 업계로서는 일본에서 일고 있는 이 같은 소비의 크로스 오버 경향과 함께 특정 분야 마니아들의 활
약을 눈 여겨 살펴봐야 할 것이다. 우리 업계의 대일 마케팅은 물론 한류열풍의 확산을 위해서도 이들을
활용해야 할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기식 ksp@kotra.or.kr
- KOTRA 후쿠오카 무역관장
http://cafe.daum.net/japanmono 발췌

2008년 11월 13일 목요일

원령공주_100자평_200713025김효은


원령공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친환경적 성향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 주제를 이번 원령공주에서는 굉장히 난해하게 제시한 것 같다.
문명의 발전과 자연의 보호 이 두 개의 입장이 대립적 구도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에보시는 마을을 지키는 지도자로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문명의 발전을 요구하고 산은 자연의 정령들을 보호하기 위해 에보시의 무차별적의 자연파괴를 막으려고 한다. 여기서 보다시피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여기서 미야자키는 말해주고 싶은 것은 자연보호에 대한 심화 적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애니 속에서 문제에 대한 힌트를 주는 주체가 바로 아시타카다. 대사 내용 중에서도 아시타카가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서쪽의 숲, 사슴신의 숲으로 가야한다고 말하고 흐림 없는 눈으로 사물을 관철하라고 한다. 여기서 아시타카는 문명과 자연의 중립적 입장으로 답을 조금씩 제시해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애니메이션을 계속 보면서 굉장히 궁금한 것은 이 두 개의 대립구조가 과연 어떻게 해결 되느냐다. 그 해결과정 속에서 던져지는 소재가 바로 사슴신과 사슴신의 목을 따러온 사냥꾼들이다. 사슴신이 목을 빼앗겨 폭주로 인해 모든 생명을 앗아갈 때, 숲(자연)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산은 인간에 대한 증오를 접고 아사타카와 협력한다.
그리고 결국 사슴신의 목을 주어 폭주를 막는다. 사슴신은 죽고 숲은 사슴신의 손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지막에는 마을과 자연의 대립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슴신의 폭주와 그것을 막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아사타카는 그 과정을 중립적인 주체자로서 이끌고 나갔다. 마지막엔 아사타카는 마을을 지키고 산은 자연을 지켜 둘의 조화를 이끌어 간다고 내용을 마무리 짓는다.
주제 자체가 현실 속에서도 건드리기 쉽지 않은 문명의 발전과 자연 보호의 입장 차이다. 이 주제에 대해 명백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그 문제에 대해서 심화 적으로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

원령공주를 보고 - 200713035 오예승

항상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보면 자연과 신과 인간의 관계가 많이 드러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그렇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그렇고, 이웃집 토토로 등등 일본 전통 샤머니즘이 묻어난다. 원령공주도 마찬가지다. 원령공주는 걔중에서도 아예 직접적으로 그 부분을 건드리고 들어간 듯 하다. 자연을 멋대로 정복하는 인간과 그러한 인간과 대립하는 자연. 그리고 신. 되게 멋있는 주제이긴 한데, 글쎄 나한테는 그렇게 와닿치 않는다. 물론 일본 전통 문화를 펌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이 마치 인간의 적이라도 되는 것 마냥 또 그러한 자연신들을 떠받들이는 그러한 것은 나에게 와닿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가장 큰 강점이고 서구에서도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은 원래 자연을 정복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나와는 개인적으로 맞지는 않는 것 같다.(동물들이 건방지게 인간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인간은 신이라고 숭배하고 이러는게 맘에 안든다.아주 지극히 개인적 감상평)
그런 이유에서 일까, 예전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들이 좋았는데 요즘엔 이 마저도 식상해져 버렸다.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중에 좋은 것은 마녀배달부 키키, 천공의 성 라퓨타이다. 이유는 위에 말 한 것과 같다. 그것들은 그냥 그 자체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원령공주는 다르다. 시대배경은 현재가 아니지만 현재의 문제를 아주 진지하고 무겁게 다루고 있다. 어찌보면 하야오 인간들의 무차별 자연개발에 대한 경각심을 환타지로서 푼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인간은 계속 자연을 정복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게 정상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모노노케히메같은 캐릭터는 왠지 비현실 적이고, 얼굴이 이쁘장한 캐릭터여서 그렇지 그렇지 않다면 싸이코와 괴짜 취급을 받을 만한 캐릭터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안그런가. 사실 원령공주의 두 남녀 주인공이 더 정상같지 않고 주변인물들이 더 정상같은 이유는 뭘까.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공지사항~~

강의계획서 보정입니다.
조별 면담 이후, 각팀의 연구주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시 구성했습니다.
추가 요구 사항 올려주시면 최대한 반영해 보지요.

11-7: 원령공주, 리서치 연구법 보조
11-14: 앨리스 , 소-닭 2차 미팅
11-21: 오세암 or 원더풀데이즈 , 용-개구리 2차 미팅
11-28: 단편영화+러시안 애니메이션 , 오픈 미팅
12-5: 발표- 소 닭 개 염소 (권고)
12-12: 발표-개구리, 쥐, 염소, 말 , 닭, 용

앞으로 볼 작품의 백자 평은 블러그에 올리되, 희망자만 씁니다. (가산점)
상대편 팀에게 도움이 되는 대화가 오고 가길 바래요.
각 팀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을 질문이나 소재제시 형태로 백자평 요청을 하셔도 좋습니다. 백자평 관련글을 올릴때는 라벨에 영화제목을 띠어쓰기 없이 넣어주세요.

2008년 11월 1일 토요일

개구리조

얀 츠반크마이어의 작품과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감독들의 영상에 대한 비교분석.



얀 츠반크마이어의 영향을 받은 감독들 중 세사람을 선택(퀘이형제,팀 버튼,테리 길리엄)

이들의 영상작품을 조사하면서 어떤 부분이 얀 츠반크마이어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비교분석-영상 및 철학 등등. (영상자료를 찾아 얀의 작품과 영향받은 감독의 작품을 분할 편집해서 동시에 보여줄 수 있게 할 수도 있고 등등...)



최민지 -얀 츠반크마이어의 작품 조사

김나라 -퀘이 형제의 작품조사

임소현 -팀 버튼의 작품조사

주성현 -테리 길리엄의 작품조사



발표는 각자가 맡은 작품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되고

개인당 5분여로 시간을 잡을 것임.

하지만 교수님과의 면담에서 간혹 길어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셨기에

시간 조정은 차후 필히 조정할 것임.



이상 개구리조 게시물이었습니다.

***혹시나 추가하고 싶은 내용이 있거나 내가 틀리게 적은것이 있다거나 대장이 바꾸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개구리조는 맘대로 바꾸시길^^-근데 딴 사람이 게시물 수정 못하나???
암튼 안되면 다시 적든 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