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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7일 목요일

Jan Svankmajer-200415408 주성현

Jan Svankmajer에 관한 필름을 본지 어연 3주째 되는데도 그저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기말 발표 연구 주제와 관련되었다는 것도 충분히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이지만 결국 Jan Svankmajer의 뛰어난 영상적 충격에서 오는 기억 속 각인이리라 생각된다.
내가 생각하는 Jan Svankmajer의 영상적 충격은 정형성을 띈 오브제들의 비정형성에서 온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레 기괴함이나 혐오스러움의 표본이 되고 뇌리에 박힌다. 하지만 마냥 혐오스럽고 징그럽고 기괴하기만 하다면 지금의 Jan Svankmajer가 존재했을까. 영상안에 담긴 그 여러가지들의 느낌이야 말로 Jan Svankmajer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일 거라 믿는다. 각자가 느끼는 것들. 초현실주의적이어서 몽환적이든, 마냥 징그럽고 싫든, 좋든. Jan Svankmajer는 그런 여러가지 느낌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을 알아내려고 하기보단 느낌으로 알게되는 것. 어렵지만 이런게 Jan Svankmajer의 필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200713027 남궁민승

개인적으로 얀 슈반크마이어의 작품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존경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뭐랄까.. 시각적으로 충격을 주는 방법을 잘 아는 작가중 하나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딱히 보고 싶어하지 않는 소재와 질감의 물질들을 차용함으로 보여지는 그 느낌이란. 그런데 너무 실제적이라 무어라 욕할 수는 없고, 보자니 더러운 기분이 들고.
슈반크마이어가 전하는 메시지는 언제나 단순하지만 그가 애니메이션 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특유의 기괴하고 잔인하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비주얼 때문이 아닐까. 그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을 이용해서 그것들이 가진 본래의 이미지들을 파괴해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바꿔버린다. 슈반크마이어가 부여하는 새로운 목적들이 그 물체들에 반영이 되고, 감독의 생각대로 더 기괴하고 괴상하고 괴팍한 물건들로 거듭나고.. 그래서 더 그의 영상이 섬뜩하고 무섭지 않나 싶다.


참 어떻게 보자면 슈반크마이어와 표도르는 극과 극을 달리는 작가다. 둘 다 어떻게 보면 심플하고 어딘가 맞닿아 있는 사회적이고도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썰을 푸는 방식이 판이하다.
슈반크마이어는 충격적인 비주얼과 극단적 내러티브로써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표도르는 보다 단순하고 친숙한 캐릭터와 비주얼을 사용한다. 슈반크마이어의 작품이 관중을 선동하는 붉은 띠 같다면 표도르는 마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같은 느낌이 든다. 어쨌든 표도르의 작품이 접하기에는 편하다. 그러면서도 가볍지 않은 주제를 능란하게 다룬다.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랄까.
어느 범죄자의 이야기는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사회 비판적이다. 개인을 억누르는 사회 - 사람으로써의 사회를 그려냈는데 누구나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자극적이지는 않다. 분명 이 스토리로 슈반크마이어가 연출했다면 필시 고깃덩어리들이 날아다니고 인형들이 나와서 난리를 쳤겠지만 표도르는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 외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의 영상은 변함없이 단순하고 귀여운 캐릭터들이 나온다. 액자.. 나 섬 등에서도 나타나지만 그의 그림은 일관적이다. 그러면서도 둘 다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주제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 이게 두 거장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쉬운 질문이 아닐까 싶다.

200713040 이유진

순수해 보이는 피사체 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기괴한 행동을 하고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무섭다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다.
이러한 상황이 당연하다는 것 처럼 덤덤하기 까지 하다.
이런 점에서 얀 슈반크 마이어의 작품은 꿈과 닮아있는 것 같다.
꿈 속에서는 그 어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연출 되어도 그것이 당연한 일이고, 별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나중에 깨어나 꿈을 다시 돌이켜 보면 무서워 진다.
왜 꿈은 무의식의 표출이라고들 흔히 말하지 않는가?
그럼 나의 무의식에는 어떤 인식이 바탕으로 깔려 있길래 꿈 속에서 그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 들인 것인지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가 징그럽게 느껴진다.
나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가 혐오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려 하고 부정하려 하지만 얀 슈반크 마이어의 작품에서는 그런 부분을 적나라하게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보면 흔히들 듣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작품에선 자신이 드러나게 된다고.
나 또한 이 말에 공감한다. 그래서 때로는 내 그림으로 내가 벌거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림을 그린다.'라는 행동 자체에 현기증을 느낄 때도 적지 않다.
때로는 일부러 내 자신을 숨기는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기도 한다.
보통은 실패로 끝나지만 아닌척 하는 정도의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감추고 죄인을 만드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정말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는 점이 한없이 대단해 보이고, 동시에 얄미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얀 슈반크 마이어의 작품을 볼 때면 이유 모를 불쾌함이 드는 것 같다.

[200415400 이홍규] 얀 스반크 마이어


얀 스반크 마이어

영상과 200415400 이홍규



그의 작품은 기괴하고 독창적이며 인상적이다. 물론 이 표현엔 무조건적인 긍정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록 팀 버튼, 테리 길리엄, 퀘이 형제에게 큰 영향을 준 거장이라 할지라도, 그의 작품은 내게 혼란스러움과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어느새 내면에서 둘로 나뉘어 그의 작품을 나름의 주관에 의해 해석하게 된다.


우선,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그의 작품 ‘자바워크’에서 새끼 인형이 어미인형의 몸속에서 나오고 마치 거미인양 어미를 먹어치우는 식의 연출이나, 새싹이 돋고 나무가 자라 열매가 열렸는데 그 안에 온통 구더기가 들어있는 씬의 경우에는 혐오스러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2000년도 작품인 ‘Otesanek’에서는 그 수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사람모양의 나무뿌리가 아내의 사랑을 받아 실제 살아 움직이게 되어 고양이나 사람을 처참히 잡아먹는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일반적인 정서와 통념을 넘어서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성으로 다가오기보다는 그 외의 부정적인 감상들이 앞서, 본질적인 메시지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는 듯 했다. 물론 이것은 나의 경우에 국한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과도한 잔인함과 징그러운 표현법은 아무래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다른 한편에선 그만의 독보적인 장점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장점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강하게 각인되었다. 일반적인 통념을 철저히 깨부순 그의 천재적인 연출과 거침없고 과감한 표현방식은 ‘자바워크’에서는 옷에 불과한 와이셔츠를 살아 춤추게 하고, 그 빈 소매에서는 병정들이 나와 행군을 하는 등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모순적이고 희한한 오브제들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그 스타일은 위에서 언급했던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큰 자극이 되어주었고,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얀 스반크 마이어는 고유의 경험에 생명을 불어넣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생각보다 놀라웠다. 그의 작품에선 먹는 것에 대한 행위가 자주 드러나는데 그것은 유년시절 허약한 아이였던 그에게 부모가 음식을 강제로 먹이곤 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의 무의식적인 표현이었다고 한다. 또 그 때문인지 그는 음식(食)에 대해 문명의 심벌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창작자에게 있어 경험이 얼마나 소중하고 위대한 자산인지 그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비록 그가 가지고 있는 표현방식에 있어 익숙하지 않고 생소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스타일에서 풍기는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호기심과 상상력의 향취는 그것을 감수해내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액션에 굳이 경계를 두지 않고 그것들 모두를 그저 생각에 대한 표현방식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그를 통해 너무 작은 것에만 얽매여왔던 나의 좁은 식견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얀 슈반크마이어, 표트르

(편의상 레이블은 얀 슈반크마이어쪽으로 넣겠습니다)

200713033 심영보


얀 슈반크마이어

얼마 전에 다른 과목에서 영화 장르 연구를 한 적이 있다. 그 과제 덕분에, 얀 슈반크마이어의 필름을 보자마자 나는 그의 작품 장르를 바로 간파해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컬트 애니메이션이로구나!’
그 때, 장르연구에서 내가 찾아낸 컬트영화의 공통점이 죄다 적용되었던 것이다. 첫째, 광인의 정신세계를 표현할 것. 둘째, (광인의 시점을 선택한 당연한 결과로)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느낌이 들 것. 셋째, 그 와중에 임팩트를 줘야 하는 부분은 수위를 넘는 잔혹성(또는 성적 표현)으로 강조할 것.
얀 슈반크마이어 필름의 광기는 피터팬 콤플렉스에 집약되어 있다. 이것 또한 컬트영화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많은 컬트 필름들(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프릭스, 성스러운 피 등등)이 주인공의 정신적 정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성적인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동물적 폭력성을 제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며, 동화적인 세계에 둘러싸여 영원한 유년기에 표류한다. 피터팬을 주인공으로 세운 컬트영화들이 섹시한 표현을 자제하고 대신 피나 살점으로 강조효과를 노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장난감은 깨끗하거나 현대적이지 않다. 대부분 녹이 슬어 있거나, 얀 슈반크마이어의 경우는 깨끗하지만 구식 느낌의 인형들을 사용한다. 이런 낡고 망가진 소품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동화적 취향과의 부조화이다. 정신은 유아기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지만, 육체는 어른의 세계에서 소모당해 낡아 떨어지고만 느낌이다. 화려한 화면 속에서 피폐하고 결핍된 정신이 엿보인달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이런 유아기로 퇴행하는 느낌에 감정이입하고 좋아하니 참 큰일이다.


표트르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효도르? 표트르? 러시아니까 표트르겠지?
처음 이 작가의 필름을 접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배송비를 맞추려고 끼워 넣은 삼천원짜리 DVD였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뭣보다도 이 사람 특유의 딱딱 끊어지는 동화가 인상깊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애니메이터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는 편이라 작가주의적인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기에, 시간도 돈도 넘쳐나는 사람들이니 유리 노르슈테인처럼 빡빡한 질감에 빡빡한 움직임이 많겠구나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외려 플래시 애니메이션 느낌에 가까운 담백한 느낌이었달까? 쿨한 액팅과 카툰적인 이미지가 잘 어울려서 깔끔하면서도 센스있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의 필름은 성우를 거의 쓰지 않는데, 특유의 액팅과 미쟝센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좀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표트르가 만들어낸 경쾌한 리듬과 화면은 러시아보다는 파리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필름이 러시아의 추위를 연상시키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라는게 또 하나의 재미있는 점이다.

2008년 11월 20일 목요일

Jabberwocky(1971)감상후기_200713050_한수연

Jan Svankmajer-jabberwocky(1971)

어린시절 녹화해 둔 홈비디오를 대학생이 갓 되어 다시 틀어본 기억이 있다.
보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어두운 구석 한켠에서 떠오르는 추억도 있다. 어린마음에 온갖 괴상한
상상을 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스케치 북도 옷장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jabberwocky(1971) 를 보면서, Jan Svankmajer는 아마도 이런 느낌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jabberwocky라는 시가 있는데, 버려진 인형이 되살아나
돌아다닌다는 내용이다.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소꿉놀이 인형과 장난감병정들이 예전의 기억을
재현이라도 하듯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 속에는 작가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소소한 기억과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숙제공책을 찟어 종이비행기와 배를 접었던
기억이나, 작은 조각칼에 손을 베어본 일은 나도 경험해 본 것이다.
결코 평범한 작품이 아니지만, 사실은 누구나 가졌을 법한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감을 느낄 수 있다. 본디jabberwocky라는 단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말처럼 뒤죽박죽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딱히 전개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기억의 조각들이 스쳐가는 느낌을 잘 묘사 해낸다.
옷장속의 옷이 Svankmajer의 추억이 담긴 매개체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검은 고양이는 드문드문 떠오르는 공포스러운 기억들,
괴기스런 상상의 형상화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장과 동시에 추억도 봉인되어 머릿속의 기억으로 자리잡는다.
Jan Svankmajer의 작품들에서는 거의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볼 때마다
그 독특한 오브제의 기괴한 매력이 느껴진다. 단순히 외형적인 면만을 떠나서
낡은 가구, 칙칙하고 어지러운 목재바닥, 때가 낀 얼룩무늬 벽지, 기이한 문양과
환상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무대세팅에서 느껴지는 색감이나 분위기 또한 그
독특하고 환각적인 느낌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특별히 복잡한 내러티브나 연출없이도 작품의 뉘앙스를 잘 포착 해 낸다는
점에서 표현방식 또한 매우 효율적으로 보인다. 무생물이기에 살아움직임이
오히려 더욱 기괴스러운 오브제들의 무대는 자장가처럼 들리기도 하는
기묘한 음악과 어우러져 꿈인지 현실인지, Svankmajer의 훌륭하게 이미지화된
미장센들로 채워지고,공포스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추억속으로 떠나는
여행의 분위기를 가진다. 움직이는 미술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미지적인 구성이나 재현이 기발하면서도 꼼꼼하게 채워져 있다.
낡은 사진첩을 넘기면서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이미지에 대한 시각적 구성이
작품 전반을 암시하는 어떤 주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