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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8일 금요일

『오세암』_200613144 박 민아

오세암
잘 만든 작품이다.
감정 이입도 잘 되고, 감독의 의도대로 표현도 충분히 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다.
작화 붕괴도 별로 없고 액팅도 나무랄 때 없다. 나름의 분위기도 잘 잡혀 있고.
기존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 중심에 불심을 집어넣은 것이 그나마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
한 편의 잔잔한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 보면서 눈물 뺀 사람도 꾀 있을 거다.
2004 안시 페스티벌에서 대상 수상까지 한 걸작 중 걸작인데..
유독 왜 흥행에 실패 했는가에 민감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작품 하나만 놓고 본다면, 칭찬받을 점이 더 많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의 성공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몸소 보여준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작품성과 완성도만으로는 어려웠던 것일까.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이 나오면 그 작품의 평이 재밌다 어떻다가 아니라 망했다 안 망했다는 것으로 갈리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가면서도 참 착잡하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관객에게 보여 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당시 극장 개봉 당시 열악한 스크린 수에도 불구하고 한국 애니를 살리자고 찾아가 본 분들도 꾀 되시고, 실제로도 괜찮은 작품이기도 하였으나 개봉한지 얼마 안 되어 일주일이라는 충격적인 개봉 기간을 세우고 소리 소문 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물론 나중에 이러한 대작을 묻힐 수 없다는 모두들의 서명 끝에 재 상영되긴 했지만.
신파라는 어르신들의 장르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흐름상 웃고 즐기려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아이들에게 적합하지 않고, 그렇다고 어른들이 쉽사리 표 끊기도 그러한.
확실히 관객의 연령대가 애매모호한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었긴 하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 작품의 경우를 보면 배급과 홍보가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얼마나 짜고 야박한지도 잘 알 수 있다. 그래, 제일 중요한 마케팅의 부재이다.
삼류 영화들은 개봉하기 전부터 광고다 인터뷰다 시끌벅적하게 해서 별 관심 없는 사람도 제목 내용까지 억지로 기억하게 하면서, 한 영화관 당 극장 여러 개까지 내주며 잘도 홍보해주면서 정작 이런 데서 고개를 돌리시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
개봉을 하더라도 하루 종일 해주지도 않는다.
오전 중에 상영해 버리고는 다른 영화 거는 거 번번이 봐왔다.
‘아치와 씨팍’ 때도 그랬다. 돈 벌려고 영화관하는 거지만, 정말 뭐 같다.
영화관이라는 거 관객 한 명을 위해서도 영화를 돌려야하는 거란 말이다.
작품에서 문제를 따진다면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운이 없었다고 밖에 말하고 싶다.
하긴, 당시 같이 개봉한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다 보니… 여기서 할 말 다 했다.
잘 팔리는 작품이라 하여 분석하고 도표 만들고 어느 정도 연구하면 꾀 그럴 듯한 논문은 나오겠지만, 사실상 따지자면 그런 작품이란 없다.
이렇게까지 하고, 그렇게까지 만들었는데 성공이 안 되더라.
중요한 것은 여기서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관객 수가 어떻든 간에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며 더 다양하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최종 목적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여기저기서 지원도 끊임없이 해 주고.
가야할 길은 멀다. 흥행 성공은 그길로 가는 동안에 얻는 부수입일 뿐이다.

200713047 천혜림 - 오세암 감상평


애니메이션 <오세암>은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故 정채봉 선생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던 원작을 순수함 가득한 가족용 애니메이션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한 제작진들의 노고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푸근한 한국 고유의 정서를 담아내겠다는 의지로 기획되어진 <오세암>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성장기가 담긴 서정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되어 많은 관객들의 관심 속에 표면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故 정채봉 선생 특유의 시적 표현이 상당 부분 살려져 있는 감성적 대사와 작품 전반에 깔린 한국적 신파극 형태의 정서는 작품에 대한 평가를 극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흔히 <오세암>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는 영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그리움이라는 감정, 한국적인 인물과 전경의 표현은 네러티브적 요소 및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 자체가 관객에게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의 가장 큰 비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오세암>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관객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연령대를 가늠할 수 없는 애매한 감성적 스토리에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게 하는 관객 또한 생겨나게 하였다. 확실히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기 전과 최근의 감상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관객의 반응과 평가가 극적으로 엇갈리기까지에는 감상의 시각적, 지식적 차이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오세암>이 극영화의 well-made적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스토리와 인물의 구조적 짜임새 및 전개가 주체적인 하나의 작품으로서 라기 보다는 전설과 원작의 재현에 좀 더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였기 때문에만 이해가 가능한 <오세암>이 가지는 한국애니메이션사의 커다란 의미 역시 주목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 유럽애니메이션 등의 자극적이고 화려하며 세련된 영상미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다소 부족하고 소박하게 다가왔을지 모르겠으나, <원더풀데이즈>와 같은 엄청난 제작비를 동행한 작품들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완성도와 영상미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많은 발전을 눈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어머니’라는 소재는 이미 한국인의 감성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소재이다. 영화, 만화, 문학을 통틀어 <오세암> 이전의 수많은 작품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가장 성스럽고 그리운, 한국인의 대표적인 고전적 향수의 표본이 바로 그것이다. 구성력 있는 전개와 심층적인 고찰이 이루어진 인물을 통해 이러한 소재를 표현했다면 시대를 아울러 모두가 동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진정 <오세암>이 추구하고자 했던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은 역시 개인의 감성에 의해 평가가 좌지우지 되곤 한다. 한 사람의 감성을 축적하는 것은 개인의 일생에 걸친 경험과 지식의 산물이다. 길손이처럼 어머니의 존재를 갈구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있는가하면, 밑도 끝도 없이 엄마를 그리워하는 길손이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오세암>은 모든 관객의 감성의 문을 열기에는 그 문턱이 너무 좁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직 자신의 감정에만 솔직한 어린 마음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지금은 간지럽지도 않은, 오로지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었던 창피하고 두려운 마음을 <오세암>을 보면서 조금 상기시켰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울려퍼지는 OST와 함께 그제야 수면위로 조금씩 울렁이는 아려한 향수와 추억은 오로지 <오세암>을 보면서만 느낄 수 있었던 행복이었다.

오세암 감상평 _200713019 김다희

( 오세암 100자 평)

그 시간, 그 공간 모두 내가 보고 느끼지 못했던 순간이지만 부모님의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친숙함이 느껴졌던 애니메이션이다.
아직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전통의 모습과 순박하게 웃는 아이들, 그리고 자연과 함께 어울려 해질녘까지 뛰어노는 시간들. 힘들어도 웃을 수 있었던 그런 순수함이 남아있던 시대의 이야기를 나는 동경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작품이 해외에서 상을 탈 수 있었던 이유도 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 순수하기만 한 나라의 사람들의 정서에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세암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화려함이나 흥겹고 재밌는 코믹적인 스토리는 잘 끌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순수한 감정의 호소력으로 그 어떤 나라도 표현하기 힘든 우리만이 가진 스토리텔링의 힘을 표현했다.
오세암의 중심적인 스토리의 진행은 ‘그림움’으로 압축할 수 있다. 길손이도 누나도 엄마와 서로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우리나라처럼 가족애가 강했던 나라가 있을까?
그들의 행동하나하나는 모두 가족에 초점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서로를 위해 변하고 배려했고, 서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가장 큰 슬픔을 느낀다.
이는 우리나라의 ‘한’의 정서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상을 표현했지만, 힘든 그들의 삶속에서 나온 ‘한’의 정서에는 전통과 슬픔, 배경이 묻어나온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나 생각했을 법한 ‘한’의 정서. 우리는 수업시간에 줄기차게 이 단어를 외우면서 문제를 풀어나갔지만 이 안의 의미를 이젠 이해하고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서에 움직였다면, 이건 하나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는 슬픔과 그림움의 마음이 존재한다. 이 모든 건 절대적인 진리인 사랑 안에서 파생되는 것이므로 연령과 국경을 넘어서 이해하고 공유할 것이다.
물론 이 애니메이션이 개봉된 시기나 결말의 아쉬움과 어색한 연출 이 애니메이션의 인지도와 완성도를 떨어뜨렸지만, 작품에서 낼 수 있는 가능성은 많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나라의 많은 전문적인 애니메이터 인력이 형성될 것이다. 그 때의 연출력은 틀림없이 크게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젠 우리만의 색체를 가질 수 있는 전통적인 정서를 포함해 작품성을 높이게 된다면 세계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00415400 이홍규] 오세암

‘오세암’ 100자평


영상과
200415400 이홍규




애니메이션 ‘오세암’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네티즌의 재 상영 운동’ 이었다. 대대적인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관객이 영화를 살리고 싶어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예산이지만 철저한 계획 속에 제작되어 주변의 높은 기대를 받으며 극장에서 개봉하게 된 오세암, 하지만 다양한 악재들로 인해 너무나도 일찍 극장에서 간판을 내리게 되었고, 네티즌의 요청으로 인한 재 상영 역시 결과는 역시 좋지 못한 편이었다.

안시 페스티벌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중 최고수상인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을 만큼 인정받은 작품이 왜 국내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일까? 일각에서는 멀티플렉스 극장들의 홀대와 횡포, 그리고 제작사의 홍보부족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작품 자체에는 그러한 요인이 될 만한 사항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지난주 수업을 통해 ‘오세암’을 감상하면서 느낀 거지만 이 작품은 다른 애니메이션들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 특성은 ‘오세암’에게는 궁극적인 단점이 됨과 동시에 장점이 되기도 해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주관적인 판단에 의거)

우선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은 작품을 감상한 뒤로부터 며칠이 지나면 아련한 감동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작 작품을 관람할 당시에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장점과 맞물려 심각한 단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실제로 처음 영화를 볼 당시에는 너무 인위적이고 통속적인 신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억지 눈물조차도 짜내기 힘들었다. 스토리 또한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은 원작과 고증이 존재하기 때문에 안정적이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넘어오면서, 판타지적이고 드라마적인 요소를 억지로 끼워 맞추듯이 표현하는데 에 있어 무리수를 두었기 때문에 씬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지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감상 후 며칠이 지나자 관람당시 아쉬웠던 요소들은 점차 잊혀 갔고, ‘오세암’의 한 장면 한 장면에 머릿속에 그려지며 길손이의 구슬프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내 기억 속 아련한 추억이라도 되는 양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난 아름다운 한국 고유의 색채와 정서를 담아내는데 성공했음에도 자잘하고 소소한 연출의 문제로 인해 그 옥석이 가려져 버린 ‘오세암’ 의 아쉬움과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만 치중해왔던 한국 애니메이션의 고질적인 문제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방법이 제시된 것 같아 무엇보다 희망적이고 기뻤다. 비록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다른 그 무엇보다 ‘오세암’ 이라는 작품이 빛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세암’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마침표가 아닌 쉼표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 고유의 문화를 통해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도처해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단기적인 수확을 바라기 보다는 점진적인 발전을 믿고 기대하면서 계속적인 노력을 한다면, 그렇게 우리가 마음을 다해 부르다 보면, 언젠가는 대한민국 애니메이션이 국내 관객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그날이 도래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513086_정현기_'한국적인' 애니메이션

오세암-'한국적인' 애니메이션에 대한 문제 제기.

한국 애니메이션의 위기를 이야기 하면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바로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단 애니메이션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산업 전반에 걸친 강박에 가까운 히스테릭이다. "한국적인 것이 바로 세계적인 것이다", "한국 문화를 세계로"라는 욕망은 정서상의 동정과 결합하여, '정말로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을 낳고야 말았다. 결과는, 해외에서는 호평, 국내에서는 참패이다. 그것으로 국내의 관객 수준이 떨어지고 해외에서는 통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비슷한 사례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들 수 있다. '서편제', '춘향뎐', '취화선' 등의 작품으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그 아우라를 국내에서 확실하게 기반 잡게 한 임권택 감독의 성공사례는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하다. 한국적인 색체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여주는 것이 성공의 열쇠인 양 만들었던 것이 오세암이다. 오세암의 개봉은 취화선과 맞물려, '한국 애니메이션을 부흥시켜야 한다' 는 관객의 동정을 사는데 성공했으나, 흥행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일부에서는, '한국 관객들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대함이 아직 모자란다' 라고 해석되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적인 문화와 정서, 색채 등에 있지 않다. 아무리 그런 것들을 영화 전반에 깔아놓아도, 이야기 구조가 받쳐주지 않으면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오세암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서 죽쑤었던 '원더플데이즈' 역시 비슷한 평을 받았다. 장면 장면 스틸만 놓고 본다면, '우리의 기술력이 많이 발전되었다' 라고 평을 받을만 했다. 하지만 극장을 빠져나오는 관객들은 입맛이 쓰다. 관객의 욕망에 이야기가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세암의 가장 큰 문제는, 사정없이 몰아치는 '서정성(마마보이 걸들에 관한 성장기)'도 있겠지만, 이야기 전체의 구조가 '신에게 회귀하다' 라고 결론지어지기 때문이다. 오세암이라는 종교적 특성이 강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리고 전설에서 차용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두 인간의 이야기이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욕망과 갈등을 그렸어야 했다. 하지만 관객이 애정을 쏟을만한 캐릭터성이라든가 욕망, 갈등, 좌절 등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부담감과 동정심을 동시에 가지고 극장에 들어가고 있다.

2008년 11월 26일 수요일

200713033 심영보 오세암


200713033 심영보


오세암


보는 내내 참 낯부끄러웠던 필름이다. 보통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유치한 상황 연출은 로맨틱한 장면일 경우가 많은데, 로맨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부끄러울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참고로 민망한 상황 연출의 대가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생각이 든다. 미야자키의 필름 속 로맨스는 어찌 그리 부끄럽던지... 센과 치히로의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 씬이나 아시타카의 ‘당신은 아름다워’ 씬은 충격과 낯 뜨거움의 결정체였다.)
오세암을 남부끄럽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대사이다. 대사 자체는 아름답다. 그러나 지나치게 소설적이다. 소설적인 대사는 소설 속에서는 어색하지 않지만, 영상에서는 다른 문제다.
소설과 영상의 가장 큰 차이는 시간성이다. 소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단 하루의 시간을 수십 권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수십 년의 시간을 한 권에 압축할 수도 있다. 주인공의 기나긴 독백을 읽으면서도 독자는 그 독백이 고작 5초 안에 떠올린 감상이라는 사실을 굳이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이 이렇듯 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자가 소설을 통해서 보는 것은 어느 누군가의 ‘기억의 기록’ 이다. 마치 일기장처럼. 소설은 독자의 시간을 장악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 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났던, 혹은 일어날 수 있는 누군가의 기억’ 으로 여기게 된다. 기억은 개인의 감정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1초의 순간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영원처럼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독자는 무의식중에 그런 ‘가능성’ 을 배제하지 않게 되고, 이것이 소설이 엿가락 늘이듯 시간을 주무를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영상은 다르다. 관객이 영상을 보는 동안에도 시간은 꾸준히 흘러간다. 관객은 주인공이 체험하는 시간과 자신이 영화를 보며 흐르는 시간을 동시간대의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특별히 시간과 관련된 연출이 삽입되지 않는다면, 시간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관객의 감정 이입은 끊어져 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면, 실제로 관객이 그 부분의 필름을 보는 시간 또한 짧아야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보통 데이트 장면을 표현할 때, 1분 안에 노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쉬움을 표현하지 하루 종일 노는 모습을 길게 보여주고는 “어머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라는 대사로 때우지는 않는다.
오세암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감이의 서정적인 대사는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인 상황 속에서 어울리는 대사이다. 그러나 감이는 그 상황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보내는 듯한 감성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관객에게는 고작 몇 초 만에 훌쩍 넘어가버리는 시간인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몇 초간 단풍잎좀 만져보았다고 시 한수가 절로 나오는 감이의 캐릭터성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그 이전에 감이가 감정을 이입해야 할 대상이 맞는지도 애매모호하다. 대체 누구의 시간에 관객의 시간을 맞춰야 하는가? 주인공은 누구인가?
오세암의 틈틈이 긴장을 풀어주는 개그요소라던지, 부처님의 입만을 보여주는 연출 등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싶었다면, 관객이 동조할 수 있는 명확한 주인공을 제시하고 그가 느끼는 시간을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도 저도 아닌 방관자적 위치에 놓인 관객에게 섬세한 감성적 대사를 들려준들 민망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뿐이다.

2008년 11월 23일 일요일

오세암 감상후기_200713050_한수연


이 애니메이션이 개봉된 후 학교에서 DVD를 틀어주었는데,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이 공감 어린 진심에서 나오는 것보다
어색하게 다가오는 연기와 대사가 생소하고 당혹스러워 웃고 마는
것이어서 조금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수준 있는 퀄리티의 몽타주는 작품의 질이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또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잡아내는 카메라의 위치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오가며 순수하고 애틋한 감정을 부각시키려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감이의 입장에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설명된다는
점은 감성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맞물리며 발생되는 ‘심정의 물결’을
부추기며, 넓은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는 남매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또 찾아 해매는
부분은 그저 감상적으로만 보기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신선한 소재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겉치레에 그치지 않고
진심을 담고자 한 의지가 묻어나기에 그 의도만큼 굉장히
순수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산골 마을, 암자의 배경 이미지는 외로운 남매의 처지와 잘 맞물리며
부드럽고 섬세한 아트웍이나 섬집 아기의 멜로디는 감미로움을 더한다.

오랜 시간 눈 속에 고립된 길손이는 법당에서 계속해서 보살 그림에게
말을 걸지만, 어떤 도움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설정은 오세암이
인위적인 재미를 강조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연출된 즐거움을 벗어나, 원작의 재미에 인간적인 감수성을 담아
보편적인 정서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담아내려고 시도한 수작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서가 간간히 부담스러운 심파극의 형태로
비춰지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어린아이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어른스러운 형태의 대사나, 연기, (왠지 그러한 수준의
생각을 가진 아이가 유아적인 순수함을 유지한다는 설정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감정 선을 높게 책정하여 일반적인 정서와
이질적으로 생각될 만큼 절절한 장면연출은 감동을 넘어서
무안함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물론 인간적인 순수함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우리 애니메이션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감수성을 잘 표현 해 내었다고 느낀다.
다만 평면적인 형태에 그치지 않고 그 특유의 정서가
보다 더 감각적이고 현대적으로 다듬어진다면,
대사에서 짜내는 언어적인 감수성만을 떠나 작품전체의 미학적 가치를
증폭시키는 유동적인 호소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