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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원령공주_..200613144 박 민아

인간의 과도한 문명 발달에 대해 신랄하게 비꼬며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애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늘 그러하다.
환경 친화적이고 자연주의적이며 인류발달을 지나치게 혐오한다.
물론 지브리 특유의 멋들어진 감각의 수채화와 부드러운 느낌이 그러한 과도한 성향을 덮어주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어쩜 저렇게 철의 느낌을 해괴하고 지저분하게 묘사할 수가 있는지 신기하다.
부분 부분의 묘사들도 환상적인 느낌과 동시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신이라는 존재도 완벽하지 못하지만, 역시나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격의 대상으로 비춰진다.
어른의 판타지랄까.
피가 난무하는 꾀나 잔인한 장면들이 다수 등장 하는지라,
중학교 때 처음보고 꾀나 충격이었던 기억이 난다.
여자 주인공 얼굴이랑 남자 주인공 얼굴이 똑같이 생긴 것도 혼란을 준다.
왜 이렇게 여자를 못 그리는 건지 모르겠다.
뭐, 그래도 암울하게만 이어가질 않고 재치 있고 가볍지만은 않게 적당히 심각하게 풀어나가다가 마지막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나름 교훈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음악. 환상적이다.
이 정도라면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 보더라도
10점 만점에 8,9점은 거뜬히 딸 수 있지 않을까.

원령공주 100자평

원령공주

200713033 심영보


나는 원령공주를 맨 처음 보았을 때 굉장히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볼 땐 못 만들어서 재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이유를 알 것 같다. 확실히 말해서 이 작품은 결론이란 게 없다. 끝까지 다 보고 나서도 ‘자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됐다는 소리지?’ 라는 번뇌에 휩싸이게 된다. 용두사미형 실수는 실패한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원령공주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왜? 감독 혼자만 인정하는 망한 영화의 ‘열린 결말’ 과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은 원령공주의 ‘열린 결말’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원령공주에서 없는 것은 결론뿐만이 아니다. 선악구도 자체가 희미하다.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들과 대립하는 몬스터는 초반부터 신성시되던 절대신이다. 이외 다른 인물들도 선악의 양면성을 가지고 그 경계를 넘나든다. 그나마 가장 선에 가까운 존재가 아시타카와 산이겠지만,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못하고 서로를 떠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사람도 자신의 세계를 넘어가면서까지 상대를 포용하는 절대선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못한다.)
선악구도가 없는 상태에서의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감독이 이용하는 것은 ‘상황’ 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명확히 존재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에보시는, 그들을 굶게 하느니 차라리 신들의 세계를 공격한다. 그녀의 선택은 환경의 파괴를 가져오지만, 또한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 신장을 가져온다. 그녀의 선택은 개인의 욕망에 휩쓸리는 경우 보다는 상황상, 어쩔 수 없이 강요되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이것이 포인트다. 선악구도가 명확한 헐리우드식 애니메이션은 악당을 무찌르면 세상이 구원된다. 당연히, 우리 편인 영웅은 결점이 거의 없는 인간이다. 있어봤자 중년에다 뱃살이 좀 늘어진 정도?(인크레더블) 하지만 원령공주의 인물들은 무분별한 선의나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소망은 함부로 폄하할 수 없는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를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도 많다. 내용의 전개를 위해서 영생을 원하는 탐욕스러운 무리를 집어넣긴 했지만, 그게 주된 갈등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하다. 절대악도 없고 악당도 없으니, 한두 사람 무찌른다고 상황이 회복되지도 않는다. 그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쪽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쪽만이 나뉠 뿐이다.

결국 감독은 영웅도 악당도 없는 세상이 어떻게 멸망을 향해 굴러가는지를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휩쓸리는 개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다 보니 미야자키의 필름은 묘하게 전쟁 영화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많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영웅이 없는 사회.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담이지만, 미야자키의 캐릭터들은 상당히 순수하고 매력적인 인간으로 표현되는 편이다. 어느 필름이든 항상 등장하는 씩씩한 소녀와 속 깊은 소년의 캐릭터는, 단지 매력만을 위해서만 설정된 것은 아니다. 저런 선악구별 없는 내용을 끌어나가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적인 매력이 필요하다.
... 뭐... 사실 감독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원령공주의 부제,'살아라!'_'200713050_한수연


사슴신의 죽음을 지켜보던 아시타카는 말한다.
“ 나에게 ‘살아라.’ 하고 말하셨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있는 말 아니었을까.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갈등은 타협하지 않는
의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고 멧돼지 신으로 하여금
다른 존재를 용서하지 못하고 해치려 드는 재앙신이 되게
만들었으며. 모로 일족과 에보시를 증오관계에 놓아두었다.
자연의 신들은 인간을 거부했다.
에보시의 경우 누구보다 약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이끌 줄 아는 개혁자이자 훌륭한 리더였지만,
마찬가지로 자연과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주변에는 온갖 욕망의 무리들이 들끓는다.
그 속에서도 각자의 인물에게는 자신만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그에 따른 주체성과 존엄함을 지키고자 하는
강력하고도 필사적인 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러나 피와 복수의 오랜 싸움 끝에서 결국 남은 것은
또 다른 ‘삶’이었고, 또 ‘살아가라’는 생명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 아닌, 존재
그 자체의 주체성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고집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현실에 스스로를 묻어가게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니다... ‘살아라’는 마지막 말은 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의지를 향한
여정을 해나가고 살아간다는 것... 진정 살아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바로 그 의지... 그것은 결국 상처와 허물 끝에 공존으로 이어지고,
그럼으로서 모든 생명을 용서하고, 따뜻하게 포옹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결국에는 서로를 끌어안는 순수함에서 우러나오는 공존..
그것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원령공주 100자평 - 200713047 천혜림


모든 국가는 전설을 바탕으로 설립되고, 전설은 이미 세력을 잡은 권력자들의 구미에 맞게 아주 희미한 내용을 바탕으로 후손들이 만들어낸다. 미야자키의 어둠에 관한,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어조의 이 영화는 유럽의 꿈을 거슬러 올라가 일본의 희미하면서 상상으로 만들어진 과거에 이르기까지를 그 배경으로 삼는다.


그는 ‘일본의 고대 전설’, ‘민담’이라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아이디어 창고로 언급하며 그 가능성을 강조해 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이 <원령공주>의 초석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 감독은 그가 초창기 시절부터 품어왔던 주제를 야기 시켜 하나의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시나리오의 윤곽을 잡아왔다. 자연의 힘, 거대한 압제자와 맞서 싸우는 약자들의 투쟁,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사랑의 가치가 그것이다.


그러나 <원령공주>에서 그는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추구했다. 자연과 문명의 공존, 향수, 조화의 메시지를 떠나 좀 더 현실사회의 상처와 고통을 대변할 수 있는 작품으로써 관객에게 다가서길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스스로에게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원령공주>라는 영화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본인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저주를 받게 된 21세기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그는 아시타카가 지닌 저주의 증거인 화상 자국을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생명을 위협하고 몸으로 느끼는 고통으로 바라본다. 이 상처를 치료해가는 과정과 갈등은 현대인들에게 과거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보다 직설적인 충고를 던져준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은 작품 속에 깊숙이 녹아 있다. 독선을 향한 질타, 어느 한 쪽이 주장하는 옳고 그름과 그 기준에 맞춰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행위. 이것은 <원령공주>의 가장 핵심적인 갈등과 일련의 모순 덩어리를 엮어가고 있으며, 그 주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위험해지는 세상에서 부족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서로 다른 두 종족간의 투쟁과 긴장관계로써 나타난다.


현대의 삶은 여러 가지 문제가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고통, 상실, 분노, 변화, 복잡함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야자키는 인간과 신들의 물리적인 싸움을 통해 드러난 인간과 초자연적인 존재 사이의 관계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원령공주>를 통해 21세기가 온전히 안고 있는 하나의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이다.